바람이 시원한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갔다. 제법 큰 동네 공원에는 배드민턴장과 축구장, 농구장까지 있었다. 내가 절대로 이용할 일 없는 곳들이다. 나는 한 번씩 와서 자전거 길을 달리다 갈 뿐이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X-게임장 앞을 지나갈 때였다. 내 또래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둥글게 경사진 곳을 미끄러져 내려와 공중에서 보드를 띄우고 착지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중에 한 아이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기까지 하고 착지했다. 나는 자전거에 걸터앉은 채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릴레이하듯 보드를 탔다. 음악이 없었지만 리듬이 느껴지는 동작이 흥겨웠다. 얼마나 연습하면 저렇게 탈 수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헬멧도 쓰고, 무릎 보호대도 했지만 여기저기 많이 다치기도 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 구경했다.
그만 자리를 뜨려던 참에 한 아이가 헬멧을 벗었다.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디서 많이 본 애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단발머리. 바로 이소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들키기 전에 얼른 자전거를 타고 달아났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이소정이 하필 거기서 왜 나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페달을 밟았다. 혹시 날 본 건 아니겠지 하며 괜한 걱정도 됐다. 캐리커처 사건 이후로 이소정과 나는 얘기를 나누지 않고 지낸다. 나란히 앉은 짝이랑 매일 말없이 지내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어쩌다 백승찬 인생이 이리 꼬였나, 에휴.
그나저나 이소정은 언제부터 스케이트보드를 탔을까. 그러고 보니 아까 공중에서 한 바퀴 돈 아이가 이소정인 것 같다. 생각지 못한 이소정의 수준 높은 보드 실력에 나는 얼떨떨했다. 자전거로 공원을 몇 바퀴 돌고 지나가며 슬쩍 보니 이소정은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 숙제를 다 하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아, 참 포스터!”
뒤늦게 에너지 절약 포스터가 생각났다. 내일까지 해 가야 하는 숙제였다. 다시 일어나 포스터를 그리려니 영 귀찮았다. 그래도 찜찜한 마음에 몸을 일으켰다.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무심코 스케치북을 넘기던 나는 멈칫했다.
까만 얼굴. 지독하게 까만 얼굴이 나타났다. 이소정이 자신의 4B 연필로 까맣게 칠한 얼굴. 얼굴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로도 아이들은 이소정을 여전히 숯깜정이라고 불렀다. 이소정도 못 들은 척 반응 없이 굴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이소정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게 되었다. 꿀꺽 삼키지 못한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았다.
팔을 쭉쭉 뻗어 배드민턴을 치던 이소정의 모습이 생각났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맛있게 먹던 모습도 떠올랐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헬멧을 벗고 환하게 웃던 얼굴도.
이소정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학교에서는 내내 심드렁한 무표정으로 지내는 이소정이 그곳에서는 달랐다. 왠지 아무도 본 적 없는 비밀스러운 책 한 페이지를 들춰 본 기분이었다.
나는 지우개를 집어 들었다. 까맣게 칠해진 연필 자국 위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지우개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연필 색이 옅어졌다. 그럴수록 나의 두 손은 점점 시커메졌다. 문득 그날 시커메졌던 이소정의 노란 티셔츠 소매가 떠올랐다. 가슴 한쪽이 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