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가니 남자아이들 서넛이 내 책상 주변에 몰려 있었다.
“이게 뭐야? 더 새까매야지.”
“맞아, 더 진하게 칠해야지. 숯깜정인데!”
내가 그린 캐리커처를 보며 아이들이 한마디씩 했다. 2B 연필로도 너무 진하게 칠했나 싶었는데 아이들은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분위기에 휩싸여 나도 덩달아 말을 보탰다.
“좀 약하지? 내가 4B 연필이 없어서 말이야.”
“나한테 두 자루나 있는데 빌려 달라지.”
키득거리는 아이들 속에서 나도 같이 웃었다. 그러다 나는 이소정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바로 뒤에서 이소정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소정이 나타나도 아이들은 개의치 않고 웃어댔다.
이소정이 내 그림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잠시 스케치북을 보던 이소정이 갑자기 얼굴 부분에 칠을 하기 시작했다. 2B 연필로 칠해 놓은 위에 4B 연필로 덧칠을 했다.
아이들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가장 놀란 건 나였다. 나는 얼이 빠진 채 이소정의 손만 쳐다보았다. 한순간에 내 스케치북 속 얼굴은 새까매졌다. 거친 손길에 눈 코 입마저 사라져 버렸다. 진짜 까만 숯덩이가 된 거다.
이소정이 고개를 들어 숨죽인 채 보고 있던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얼어붙은 아이들을 향해 이소정이 ‘이제 됐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짧은 순간 이소정과 눈이 마주쳤다. 가느다란 두 눈 속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었다. 나는 왠지 그 눈빛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소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돌아섰다. 이소정의 노란 티셔츠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진한 연필심 색이 묻어 시커멨다.
마주 보고 있던 책상을 제자리로 돌렸다. 잠깐 망설이며 이소정의 책상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주위를 살폈지만, 저마다 바쁜 모습들이었다. 나는 재빨리 이소정의 책상도 바로 돌렸다. 그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연필이 도르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주워 보니 4B 연필심이 부러져 있었다. 심이 꺾인 채 부러진 걸 보니 이소정이 힘을 잔뜩 주어 칠하다 부러진 모양이었다. 그동안 심이 부러진 연필은 수도 없이 봐 왔다. 숙제하느라 짜증 날 때는 일부러 심을 뚝뚝 부러뜨리는 짓도 많이 했다. 그런데 부러진 4B 연필을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뾰족한 바늘 같은 것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한껏 멋을 부려 세워 올린 머리에 유난히 볼통한 두 볼.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나 백승찬의 얼굴이다. 내 얼굴이 교실 뒤쪽 게시판에 붙었다. 나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흠칫 놀라곤 했다.
며칠 전에 그린 캐리커처 중에 몇 장을 뽑아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 두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내 얼굴을 그린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짝 이소정이 그린 캐리커처.
그림을 제출한 후 내 얼굴은 한참 동안 칭찬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얼굴이 아니라 이소정의 그림 솜씨가. 한마디로 기분 나쁘게 잘 그린 캐리커처였다. 나의 얼굴 특징을 잘 잡아낸 눈썰미와 그것을 표현한 솜씨가 돋보였다. 이소정에게 그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소정이가 승찬이 얼굴을 정말 애정을 갖고 관찰했구나. 그리고 특징을 살려 잘 표현했고. 이게 바로 캐리커처의 표본이지.”
선생님의 칭찬은 불난 집에 기름 붓기가 되고 말았다.
“숯깜정이 백설기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네.”
“백설 공주를 사랑한 숯깜정.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냐?”
아이들은 되지도 않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시시덕거렸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진땀이 났다.
시련이 따로 없다. 비극은 고문을 넘어 시련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아직 3주나 더 이소정과 짝을 해야 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시간이 휘리릭 지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