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by 이은도

겉옷만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굶주림에 이끌렸기에 능동적 행동이다.

막상 나온 김에 담뱃갑 안에 들어 있는

개비를 하나 꺼내 물곤 1200 작계로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비싼 라이터긴 했으나 성능 하나는

그간 써왔던 라이터와 견줄 수 없다.

겉면은 단단하고 짙은 청록색을 띠어 영롱하며

아마 화력전에서 이길 수 있는 불은 없을 것이다.


실수로 떨군다고 하더라도

쉽게 망가지진 않을 테다.


주를 이루었던 생각은 불이고

혹여나, 이 작은 불이 붙어 기름 범벅이고

지성피부인 나에게 번지면 어쩌나 하곤 상상했다.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뭐든지 급작스럽게 일어난다.

씁쓸했다. 담배가 문제인 걸까

단지 속만이 씁쓸하진 않았다.


연기 그래, 연기다.

내 안과 밖을 고달프게 하는 건

금방 사라지는 이 담배연기 때문이다.


마지막 숨을 밀어 넣고 털어내

천천히 진화했다.

그리곤 빵집으로 향한

발걸음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내가 걷는 길은

애로이고

잔도이다.


애달프게도 나는 귀가 밝기에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다.


그곳은 공원인 척을 하는 광장이었다.

일렁이는 소리에 이끌려

수동적 행동을 보이며 도착했다.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손에는 마이크를 움켜잡았으나 생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곳은 꽤나 큰 광장이다.

무색하게도 관객 수는 세봐야

여덟 명 그 남짓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가 않았다.

연설자에게 채널을 맞추니

드디어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저는 무모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의 대가는 굶주림, 불균형입니다


헛된 가르침이었을까요?

혹, 참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첨언 하나 하고 싶습니다.

아, 물론 손은 들었습니다.

열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열정이 넘치면 언제나 변명거릿들로 가득합니다.

열정국 사람들은 뜨겁습니다.

다른 언어인지 번역이 필요해


능통한 자를 구해놨더니

그도 똑같은 국민이었습니다.

아주 똘똘 뭉쳐서 거품이 일었습니다.


거품은 소멸되기 마련이고

그들은 식었습니다.

맛없습니다.


버릴려니 아까웠습니다.

고심 끝에 얼렸고

저에게 잡아 먹히기 일보직전입니다.


제가 잡았습니다.

이제 그들의 무력감을 맛볼 시간입니다.


아, 식었습니다.

저도 일념이 생겨버린 겁니다.


열정이라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전염성 짙은 이 병은

치사율이 그리 높진 않습니다.


그런데, 가렵습니다.

누군가 긁어주길

살펴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오른쪽을 봅니다.

왼쪽, 앞, 그리고 뒤


다행이게도 분명 누군가 있습니다.

하지만 볼 수 없습니다.

순수 착각일까요 여러분?


거대한 그림자를 봤는데

그것도 대단히 넓고 컸습니다.


이게 삶일까요?

달콤한 거짓말에 홀랑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목소리는

목소리가 맞을까요?

마치 그것은 일종의 접신과도 같았습니다.


그게 들리면 저는 적습니다.

보고 만지는 게 불가능해도

느끼고 듣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진실이고

섹스는 치밀한 계산입니다.

고로 진실은 없습니다.




몇 초간 정적이 일자

정신을 차렸다.

직관으로 알았다.


그것은 어떤 지식이나 사고 회로를

거치지 않고 나온 답이다.

도주한다.


아직도 들린다

그 소음이


삶은 그리고 그리고를 반복해..

그리고.. 또..


마침내 멈췄다.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턴가 일그러졌다.

이 세상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시작은 어딜까?

시작의 시발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우리는 또 누군가를 책망할 것인가

다수의 행복은

소수의 불행이자 재앙이다.


역겹다. 무능력한 자신에게

그저 무거운 돌덩이를 넘겨주는

사체를 자처할 텐가?


선의의 경쟁.

다 엿까라 그래라


비겁한 방관자들

그들에게 맞는 죗값을 치르기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비극이자 희곡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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