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학교 운동장에서였다. 그때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고, 학교가 끝나고 나면 운동장 구석의 작은 놀이터에서 축구를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며 늦은 오후를 보냈다. 우리끼리는 제법 진지했고, 놀이는 언제나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항상 누군가 한 명, 가끔은 두 명이 구석에서 멀찍이 바라보기만 하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이었다. 우리 중 한 친구가 “걔도 같이 놀자”라고 했다. 그 말에 순간 조용해졌고,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 아이는 다리가 불편해서 걷는 게 서툴렀고, 뛰어놀 때마다 넘어지거나 뒤처졌다. 또 다른 아이는 우리보다 두 살이나 어렸고 몸집도 작아서, 함께 놀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때 민호가 아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걔네는 깍두기로 하면 되지 않을까?”
“깍두기?”
“응! 깍두기는 특별한 사람이야. 점수 같은 거 상관없고, 잡히지도 않고, 그냥 같이 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깍두기”라는 우리의 특별한 룰이 탄생했다.
이후 우리는 운동장에서 함께 놀 때마다 깍두기라는 말을 썼다. 깍두기는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술래잡기 할 때 깍두기는 잡히지 않았다. 축구 할 때도 깍두기는 자기 편, 남의 편 가릴 것 없이 공을 찰 수 있었다. 깍두기가 공을 엉뚱한 방향으로 차도 웃으며 함께 뛰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깍두기와 함께 논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 아이는 처음엔 어색해하며 가끔은 멈칫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만큼이나 해맑게 웃고, 소리 높여 뛰었다. 점점 웃음소리가 커지고, 우리는 그 아이가 깍두기로 놀이에 함께할 때 훨씬 즐거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깍두기를 하던 그 아이가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밝게 웃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 환하게 웃던 얼굴, 공을 차고 넘어졌지만 모두가 박수를 쳐주던 장면.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어느 날인가, 그 아이가 말했다.
“난 진짜 축구는 잘 못하는데 왜 날 같이 놀자고 했어?”
나는 잠깐 생각한 뒤 대답했다.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너랑 같이 노는 게 재미있으니깐.”
그 아이는 그 말을 듣고 환히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이후로도 우리는 종종 깍두기를 정해서 놀았다. 놀이는 점점 더 재미있어졌고, 우리에게 깍두기는 점점 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혹은 혼자 길을 걷다가 작은 놀이터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깍두기를 떠올리곤 한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안다. 깍두기라는 말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그건 어쩌면 부족하고 서툰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였고,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배려였으며, 경쟁과 승부보다는 웃음과 우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마법 같은 단어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늦은 오후 놀이터에서 울려 퍼지던 우리의 웃음소리 속엔 깍두기의 따뜻함과 순수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깍두기를 외치며 다시 한 번, 모두 함께 웃고 뛰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