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
새로운 문을 하나 짓는 것
계절 하나를 걷어내는 것
잎과 가지의 마중물로 열매를 내보내는 것
열매는 뿌리의 기억을 찾아내는 역할이 있어
이른 장마와 뜨겁던 태양을 잘 견뎌
오랜 나무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닫은 문에도 적색 신호등이 있어
나이만큼 자란 거울이 걸리고
내면을 향한 질주를 멈칫멈칫하며
추락하는 갈등과 회한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하잘것없는 나비물도 초록의 잎사귀를 길들이듯
뿌리는 잠을 뒤척여가며 꽃의 일상을 깨우고
빛과 그늘 사이에서 우줄우줄 향기를 쏟으며
기쁨과 슬픔을 찬찬히 엮어낸다
세월의 언저리에서 몸집을 키운 고통만큼
문은 ,
잘 여문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언제든 떠나도 된다는 듯, 그 문을 닫으면
한 줄기 빛으로 어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길들여진 운명은
가슴팍까지 오른 시냇물만큼 벅차다
오랜 가슴앓이를 한 뒤,
낚아챈 꿈을 펼쳐 들고 신작로로 향한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외길로 흘려보내고
깊은 칼바람으로 내면의 모퉁이를 다듬는다
닫힌 문은 또 다른 문을 만들고
뿌리의 모서리로 반생半生의 발을 내밀 수 있다
침묵이 내려앉는 어스름 저녁의 유리창에
까칠한 우울은 잦아들고
언 땅에 스며들었던 봄의 언약이
생生의 또 다른 모롱이를 다듬듯
문을 닫는다는 것은
빛나는 동사, 혹은 때깔 나는 형용사를 꾸미던
부사副詞의 각질을 벗는 일
우아한 가을로 태어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