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역할을 들어 본 적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생각해 봤어
태초에 신이 검지손가락을 통해 보낸 빛이 아담을 통과할 때
그 뒤를 숙명처럼 숨죽여 따라온 그림자
없어도 되겠지만 꼭 있어야 하는, 계륵 같은 뭐 그런 거
아마 신도 깜빡할 때가 있는 거지
빛은 그림자를 통해 말을 걸지
혼자서는 쑥스러워 이야기조차 할 수 없어
늘 그림자를 앞세우지
상대와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인 거야
실수가 허용된 빛과 실수할 수 없는 그림자의 관계
냉전 시대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지
밝음과 어둠이 냉랭한 사이였던 시대, 아마 빙하기였던가
괜찮다는 말이 괜찮지 않을 때도 많았지
흐릿한 빛이 말하는 희미한 그림자의 내용은 해석이 어려웠어
조금 더 강한 빛의 그림자가 오히려 쉬었지
약간 옆으로 기울이면 기다랗게 늘어난 대화는 어색했어
너무 다가오면 그림자는 숨어버리고 말아
빛의 실수를 해결할 수 없게 된 거지
그림자에도 색깔이 있어
색다른 맛이란 그림자의 영역이야
하얀 눈밭 위를 내리쬐는 햇살의 적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사이처럼 애매했지
추울수록 더 파래지는 허공의 색깔이
빛바랜 그림자의 변명으로 그럴듯해
떼려야 뗄 수 없는 빛과 그림자
팽팽한 시소의 균형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