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간 오전 11시 30분. 아침 9시부터 출근해 내 자리에 앉듯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자소서를 쓰고 있지만 답이 없다. 오늘은 4월 21일 목요일. 마감이 다음 주 월요일인데 주말엔 1박 2일 모임이 있어 오늘내일 안에 다 써야만 한다. 이번 주는 내내 컨디션이 안 좋았다. 올해 들어 이렇게 두통이 심하고 몸이 안 좋은 건 처음이라 혹시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닌지 의심해보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자소서 쓰기 싫어서 병이 난 것 같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출근해 심각한 두통과 속 쓰림을 겪으며 몇 시간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다 반차를 쓰고 정문을 나오자마자 뭔가 훨씬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원서를 제출하자마자 이 두통은 사라질 것임을 확신한다.
아 쓰기싫다쓰기싫다쓰기싫다쓰기싫다. 쓰기 싫어 미쳐버리겠다. 실직 후 꽤 많은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번처럼 쓰기 싫은 건 처음이다. 자기소개 문항 5개에, 직무수행계획서 5000자. 1명 뽑는데 이번엔 몇 명이나 지원할까. 예시로 나온 우대 전공과 내 전공은 비슷하지도 않다. 게다가 채용공고에 나온 수행업무에 대한 소개는 세 단어, 12글자. 이 것을 나는 5000자로 늘려 업무수행계획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5000자면 직무수행계획서 치고 그렇게 긴 것도 아니고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닌데 이번엔 정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홈페이지 어디에도 내가 지원하는 업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나와있지 않다. 별 수 없이 홈페이지를 샅샅이 살피고, 회사에서 발행한 간행물을 훑어보고, 보도자료를 찾아보고, 회사에서 운영하는 SNS를 분석하며 내 담당 업무에 대한 일을 찾고 문제점을 분석해 이를 해결할만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기획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은 최소 3일에서 길게는 10일까지도 걸린다. 이렇게 열심히 작성한 문서를 읽기나 할까. 이건 취업준비생 학대 아닌가. (번외지만 회사는 연봉과 복지 수준을 알려주지도 않고, 구직자의 한자명과 키 몸무게, 본적까지 제출하라고 하는 곳이 있다. 아무리 아쉬운 쪽은 구직자라지만 이건 저울이 기울어도 너무 기울어있다) 이걸 작성할 정도의 성의와 능력을 보겠다는 의도겠지만 여기만 쓰는 게 아닌 취준생들에게는 정말 잔혹한 항목이다.
친구네 회사에 내가 지원하는 직무 자리가 났다고, 지원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이 회사도 지원 시 직무수행계획서 10장을 제출해야했다. 대부분 그렇듯 양식도 없는 자유양식 제출. 다른 기업 일정과 겹쳐 지원하지 않았던 게 그나마 잘된 것일까. 채용이 완료된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자리에 새로 온 직원은 대표와 친분이 깊은 사이였고, 애초부터 내정된 자리였다고 한다. 그걸 모르고 나한테 지원하라고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들러리 될 뻔했는데 안 써서 너무 다행이라고 했다. 그땐 재직 중이었기에 10장의 직무수행계획서를 쓰기 위해서는 아침에 무겁게 노트북을 들고 출근했다가 퇴근 후에 스터디 카페에 가서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계획서를 쓰기 위해 낑낑댔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몇 날 며칠을. 주말도 반납하고.
3년 전인가 주말마다 노트북을 들고 연남동 카페를 돌았던 시기가 있다. 채용 시즌에 지원해야 하는 곳이 많아서. 아침 일찍 문 여는 규모가 제법 큰 카페에 가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한적하고 자리도 많다. 음료와 스콘을 시키고 2-3시간 앉아 있다가 손님이 좀 들어오는 것 같으면 도서관 노트북 열람실이나 스터디 카페에 간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는 일을 한 달 내내 했었다. 물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으니 지금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중. 나는 한 노래에 빠지면 재생모드를 한곡 반복으로 하고 그것만 듣는데, 그 당시 듣던 노래는 twice의 breakthrough. 트와이스 팬이기도 하고, 멜로디도 좋고 무대도 예뻐서 좋아한 게 더 크긴 하지만 가사도 이 당시 내 상황과 제법 맞았다(노래 가사에 내 상황을 끼워 맞추는 편). 종일 먹은 거라곤 카페에서 시킨 빵과 음료수뿐인 주린 배를 움켜쥐고 버스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너면서 한강과 파란 하늘을 바라볼 때 이 노래 가사가 내게 힘이 됐었다.
언젠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멋진 내가 될 때까지
Say say don't give up, say say don't give up
Breakthrough breakthrough breakthrough breakthrough
돌고 돌아간대도 시간은 기다려줘
빛이 나는 내 미래를 세상이 기대하고 있어
이 노래를 들으며 지금 쓰고 있는 회사에 합격했을 때 재직 중인 회사에 뭐라고 말할까. 겸손한 척 웃지 않으려 애쓰며 어떻게 말해야 더 기분이 째질까 멘트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또 그렸었다. 내 공상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내 돌파구(breakthrough)는 어딜까. 현재 시각 11시 59분. 한적했던 카페에 점심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들이닥쳤다. 책상을 붙이고 의자를 옮기고, 내 앞에 놓인 빈 의자를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다. 떠날 때가 됐구나. 조용히 짐을 들고 나선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넓은 구립도서관? 좀 좁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 도서관 열람실? 1시간에 2천 원인 스터디 카페? 배고프다. 오늘 다 쓰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시작이 반이라던데 시작은 했는데 아직 반은커녕 1할도 못 썼네.
여기까지가 공백포함 2,803자. 30분 만에 2,800자를 썼다. 3시간 넘게 한 문항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쓰고 싶은 글과 쓰고 싶지 않은 글의 차이인가. 팩트를 쓴 에세이와 픽션인 글과의 차이인가. 아 친구가 없어 노트북에 대고 하는 이 넋두리도 글이라 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