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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Apr 21. 2022

자소서 쓰기 싫은 구직자의 넋두리

 현재 시간 오전 11 30. 아침 9시부터 출근해  자리에 앉듯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자소서를 쓰고 있지만 답이 없다. 오늘은 4 21 목요일. 마감이 다음  월요일인데 주말엔 1 2 모임이 있어 오늘내일 안에  써야만 한다. 이번 주는 내내 컨디션이  좋았다. 올해 들어 이렇게 두통이 심하고 몸이  좋은  처음이라 혹시 코로나에 걸린  아닌지 의심해보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아닌  같다. 아무래도 자소서 쓰기 싫어서 병이   같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출근해 심각한 두통과  쓰림을 겪으며  시간 동안 고민하고 고민하다 반차를 쓰고 정문을 나오자마자 뭔가 훨씬 몸이 가벼워진  같은 느낌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원서를 제출하자마자  두통은 사라질 것임을 확신한다.


 아 쓰기싫다쓰기싫다쓰기싫다쓰기싫다. 쓰기 싫어 미쳐버리겠다. 실직 후 꽤 많은 지원서를 제출했지만 이번처럼 쓰기 싫은 건 처음이다. 자기소개 문항 5개에, 직무수행계획서 5000자. 1명 뽑는데 이번엔 몇 명이나 지원할까. 예시로 나온 우대 전공과 내 전공은 비슷하지도 않다. 게다가 채용공고에 나온 수행업무에 대한 소개는 세 단어, 12글자. 이 것을 나는 5000자로 늘려 업무수행계획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5000자면 직무수행계획서 치고 그렇게 긴 것도 아니고 한두 번 해본 일도 아닌데 이번엔 정말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홈페이지 어디에도 내가 지원하는 업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나와있지 않다. 별 수 없이 홈페이지를 샅샅이 살피고, 회사에서 발행한 간행물을 훑어보고, 보도자료를 찾아보고, 회사에서 운영하는 SNS를 분석하며 내 담당 업무에 대한 일을 찾고 문제점을 분석해 이를 해결할만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기획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은 최소 3일에서 길게는 10일까지도 걸린다. 이렇게 열심히 작성한 문서를 읽기나 할까. 이건 취업준비생 학대 아닌가. (번외지만 회사는 연봉과 복지 수준을 알려주지도 않고, 구직자의 한자명과 키 몸무게, 본적까지 제출하라고 하는 곳이 있다. 아무리 아쉬운 쪽은 구직자라지만 이건 저울이 기울어도 너무 기울어있다) 이걸 작성할 정도의 성의와 능력을 보겠다는 의도겠지만 여기만 쓰는 게 아닌 취준생들에게는 정말 잔혹한 항목이다.


 친구네 회사에 내가 지원하는 직무 자리가 났다고, 지원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이 회사도 지원 시 직무수행계획서 10장을 제출해야했다. 대부분 그렇듯 양식도 없는 자유양식 제출. 다른 기업 일정과 겹쳐 지원하지 않았던 게 그나마 잘된 것일까. 채용이 완료된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자리에 새로 온 직원은 대표와 친분이 깊은 사이였고, 애초부터 내정된 자리였다고 한다. 그걸 모르고 나한테 지원하라고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들러리 될 뻔했는데 안 써서 너무 다행이라고 했다. 그땐 재직 중이었기에 10장의 직무수행계획서를 쓰기 위해서는 아침에 무겁게 노트북을 들고 출근했다가 퇴근 후에 스터디 카페에 가서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계획서를 쓰기 위해 낑낑댔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몇 날 며칠을. 주말도 반납하고.


 3년 전인가 주말마다 노트북을 들고 연남동 카페를 돌았던 시기가 있다. 채용 시즌에 지원해야 하는 곳이 많아서. 아침 일찍 문 여는 규모가 제법 큰 카페에 가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한적하고 자리도 많다. 음료와 스콘을 시키고 2-3시간 앉아 있다가 손님이 좀 들어오는 것 같으면 도서관 노트북 열람실이나 스터디 카페에 간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는 일을 한 달 내내 했었다. 물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으니 지금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중. 나는 한 노래에 빠지면 재생모드를 한곡 반복으로 하고 그것만 듣는데, 그 당시 듣던 노래는 twice의 breakthrough. 트와이스 팬이기도 하고, 멜로디도 좋고 무대도 예뻐서 좋아한 게 더 크긴 하지만 가사도 이 당시 내 상황과 제법 맞았다(노래 가사에 내 상황을 끼워 맞추는 편). 종일 먹은 거라곤 카페에서 시킨 빵과 음료수뿐인 주린 배를 움켜쥐고 버스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너면서 한강과 파란 하늘을 바라볼 때 이 노래 가사가 내게 힘이 됐었다.


언젠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멋진 내가 될 때까지

Say say don't give up, say say don't give up

Breakthrough breakthrough breakthrough breakthrough

돌고 돌아간대도 시간은 기다려줘

빛이 나는 내 미래를 세상이 기대하고 있어


 이 노래를 들으며 지금 쓰고 있는 회사에 합격했을 때 재직 중인 회사에 뭐라고 말할까. 겸손한 척 웃지 않으려 애쓰며 어떻게 말해야 더 기분이 째질까 멘트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또 그렸었다. 내 공상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내 돌파구(breakthrough)는 어딜까. 현재 시각 11시 59분. 한적했던 카페에 점심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들이닥쳤다. 책상을 붙이고 의자를 옮기고, 내 앞에 놓인 빈 의자를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다. 떠날 때가 됐구나. 조용히 짐을 들고 나선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마을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넓은 구립도서관? 좀 좁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 도서관 열람실? 1시간에 2천 원인 스터디 카페? 배고프다. 오늘 다 쓰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시작이 반이라던데 시작은 했는데 아직 반은커녕 1할도 못 썼네.


 여기까지가 공백포함 2,803자. 30분 만에 2,800자를 썼다. 3시간 넘게 한 문항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쓰고 싶은 글과 쓰고 싶지 않은 글의 차이인가. 팩트를 쓴 에세이와 픽션인 글과의 차이인가. 아 친구가 없어 노트북에 대고 하는 이 넋두리도 글이라 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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