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곡에 꽂히면 한곡 반복으로 질릴 때까지 주야장천 그 노래만 듣고, 한 음식에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먹는 편이다. 그래서 우리 집엔 나름 음식 유행이 있다. 특정 떡집의 떡이 떨어지지 않게 늘 냉동실에 구비해 놓을 때도 있었고, 일명 'K-아몬드'라 불리는 온갖 맛이 나는 아몬드를 종류를 망라하고 늘 구비해두고 먹은 적도 있다. 요즘은 한 브랜드의 마늘 치킨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먹는 것 같다. 그렇게 1년 내외로 유행이 지나가는데 유독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랑하는 음식이 있다.
버블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12년 봄이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대만식 밀크티 전문점이라는 소개를 보고 망설임 없이 지원해 면접을 보러 가게 됐다. 사장님이 간단한 인적사항을 물으며 우리 가게에서 판매할 밀크티라고 만들어주신 것이 내 첫 버블티였다. 일하면서 신메뉴를 함께 맛보기도 하고, 실수로 잘못 만든 음료를 먹기도 하고, 직원들은 하루에 한 잔씩 원하는 음료를 마실 수 있어 일하면서 하루에 꼭 한두 잔은 그곳 음료를 마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차 맛과, 매장에서 직접 내린 차에 유제품을 섞은 밀크티와, 음료에 펄, 코코넛 등 각종 토핑을 넣은 버블티의 맛에 눈을 뜨게 됐다.
이후 버블티에 푹 빠진 나는 본고장의 맛을 본다며 본사가 있는 대만 여행을 떠나기까지 했다. 내가 일했던 버블티 가게는 수도 타이베이에서는 찾기 힘들었고, 대신 대만에서만 볼 수 있는 각종 브랜드 버블티를 1일 3잔씩 탐닉하며 양껏 버블티를 다 마시고 돌아왔다.
사실 버블티보다 더 오래전부터 좋아한 것은 밀크티다. 버블티 가게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이유도 밀크티 가게라는 설명 덕분이었다. 나는 200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밀크티였던 캔음료 '데자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의 10대 후반을 함께한 데자와는 당시 내가 아는 유일한 밀크티였다. 지금도 편의점 온장고에서 꺼낸 따뜻한 데자와를 보면 어둑한 독서실 책상이 떠오를 만큼 떠오를 정도로 참 좋아했다. 데자와가 좋아 밀크티를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버블티 전문점에 가게 되었으니 데자와가 나를 버블티 러버로 이끌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내가 일했던 밀크티 가게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폐업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입점한 '공차'가 우리나라 대표 버블티 전문점으로 자리매김했다. 감사하게도 직장 근처에 공차가 있어 버블티를 사서 출근하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자주 방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원과 안부를 주고받을 만큼 친해졌다. 매일 같은 음료를 주문하는 내가 종종 다른 걸 마시고 싶어 메뉴를 바꾸면 직원이 놀라며 메뉴명을 다시 확인한 적도 있고, 아침마다 근무하는 직원이 며칠 안 보이는가 싶더니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면서 내게 기념품을 건넨 적도 있다. 회사 근처에 공차가 있어 꽤나 행복했다. 힘든 회사 생활에서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버블티가 있어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버블티 러버로 사는 데에는 몇 가지 애로 사항이 있다. 가장 심각한 건 접근성 문제다. 커피는 탕비실, 편의점, 카페 등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요즘은 다들 집에 커피머신 한두 대씩은 들여놓고 집에서 갓 내린 원두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드립 커피를 티백도 잘 나와서 어디서든 간편하게 내려마신다. 제품도 종류도 다양해서 취향껏 즐길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버블티는 너무나 소수의 취향이다. 버블티를 파는 가게는 많지 않다. 그나마 요즘은 꽤 대중적인 메뉴가 되어 편의점에서 판매하기도 하고, 카페에 버블티 메뉴가 있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럽이나 파우더를 사용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찻잎을 우려 만드는 버블티 전문점에 비해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버블티 입문 당시부터 대만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에게 배운 엄격한 정석 레시피로 찻잎을 우려내 만든 버블티로 길들여진 나로서는 납득하기 쉽지 않은 퀄리티다.
버블티 전문점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대표적 버블티 전문점인 공차도 일반 카페에 비하면 매장 수가 무척 적다. 게다가 우리 집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공차가 도보로 25분 정도 걸려 접근성이 좋진 않다. 이 점에 분개해 집 근처에 직접 공차 매장을 차리려고 나름 괜찮은 자리도 구상해보고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예산에 마음을 고이 접게 됐다. 버블티 가게를 차린다면 늘 버블티 공급 부족에 시달리는 내 버블티에 대한 갈망과 취업 이슈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두 번째 애로 사항은 주변 사람들이다. 동료들과 점심식사 후 카페에 가봤자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가게마다 시럽을 쓰느냐 파우더를 쓰느냐 차이일 뿐인 밀크티를 마시거나 가격은 커피보다 1-2천 원 비싸지만 시판 티백에 물만 부어주는 티 종류다. 전엔 과일주스를 많이 마셨지만 혈당관리 및 다이어트를 이유로 생과일 아니면 잘 손이 가지 않는 메뉴다. 생과일 음료를 파는 곳은 많지 않을뿐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과일 자체의 당과 음료에 들어가는 시럽을 생각하면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동행인이 사겠다고 하면 꽤 곤란해진다. 사주는 사람은 가장 저렴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는데 내 선택지인 밀크티나 과일주스류는 5-7천 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친한 사람들은 내가 버블티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종종 먼저 공차에 가자고 제안하기도 하는데, 고마우면서도 괜히 나 때문에 억지로 먹는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내가 버블티를 마시는 것을 무척이나 유별난 것으로 인식한다. 아침에 버블티를 사서 가면 "또 마셔?"라는 반응이 대부분. "당신이 매일 아침 커피 마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제가 버블티 마시는 건 왜요. 사실 이 버블티도 차에 약간의 첨가물을 넣은 것뿐인데요. 시럽도 아주 적게 넣거나 아예 빼고 먹으니 시럽과 우유가 들어간 라테랑 사실 크게 차이 없는데요. 커피는 하루에 두세 잔씩 마시면서 왜 저한테 매 번 뭐라 하십니까. 취존좀여"라고 말하고 싶지만 오늘도 그저 "네, 하하" 억지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만다.
버블티에 빠진 지 10년째. 버블티 대신 차를 마시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두꺼운 빨대로 시원하게 호로록 들이키면 따라오는 구수한 밀크티와 은은하게 느껴지는 차의 향, 차를 넘기고 나서 쫄깃한 코코넛을 씹는 재미를 포기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버블티를 마시는 중이다. 작정하고 먹으러 나오지 않으면 먹기 힘들어서 더 맛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냥 버블티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