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만날 때마다 다른 옷 입기’
5년쯤 전인가. 친구와 새해 다짐을 했다. 옷이 없는 것이 큰 고민이었던 우리 둘은 새해에는 만날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같은 옷을 입었다거나, 다른 날의 여러 사진 속에 겹치는 아이템이 있다거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먼 거리에서도 익숙한 내 옷으로 날 알아본다거나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다. 매 번 친구를 만날 때마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마다 옷장을 뒤지며 생각한다. 난 왜 맨날 옷이 없지?
옷장엔 옷이 많은데 옷이 없다. 지독한 모순이다. 옷장 속에도 옷이 가득, 옷장 옆 행거에도 가득인데 옷이 없다. 꽤 자주 의류 앱을 켜고 옷을 고르는데 막상 내게 어울릴만한 옷이 없다. 그동안은 뭘 입고 다녔는데 이렇게 옷이 하나도 없을까. 계절은 왜 또 이리 자주 바뀌어서 계절별로 옷을 사야 하는 걸까.
내겐 옷 사는데 크게 세 가지 제약이 있다. 첫 번째는 감각의 문제다. 난 패션 감각이 있는 편도 아니고, 따라서 관심도가 무척 낮은 편이다. 엄마는 내게 “어디서 그런 옷을 사냐고, 길 돌아다니면서 네 또래 애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좀 보고 다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니, 했었다. 이제는 그런 말을 하기도 지쳐 나를 포기한 것 같다. 성인이 된 후에는 그냥 교복처럼 국민복 같은 게 정해져 있어서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옷을 고르는 것도 사는 것도 너무 귀찮다.
두 번째는 체형이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라 옷 고르는데 제약이 많다. 최근 키가 작은 사람들은 위한 옷이 많이 나왔다. 이름이 무려 ‘155 팬츠’ ‘키작녀 팬츠’다. 그러나 진정한 155센티미터 인간을 위한 옷은 아닌 것 같다. 150대인 내가 입으면 조금 길어 접거나 수선해야 한다. 164센티미터인 친구가 155 팬츠를 사면 기장이 딱 맞아 좋다는 말을 듣고 큰 배신감이 들었다. 이럴 거면 155라는 이름을 함부로 붙이지 마라. 155 팬츠도 줄여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꽤 아프니까. 게다가 예쁜 옷도 이상하게 내가 입으면 넝마가 되거나, 엄마 옷 빌려 입은 애가 되거나, 급하게 집에서 나온 사람 같은 몰골이 된다. 뭘 입어도 별로인 체형 탓에 패션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은 예산이다. 그렇다. 난 돈이 없다. 고로 옷이 없다. 의류비로 소비할 수 있는 금액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렵게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도 가격을 보고 만지작 거리다가 내려놓을 때가 많다. 혹은 만지작 거릴 수도 없을 만큼 비싸 잽싸게 내려놓고 돌아선다. 돈이 많았다면 내 패션센스도, 체형도 커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쓰고 보니 세 가지는 모두 어느 정도 교집합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 모든 이유로 인해 약속이 있는 날 옷장을 보며 허망하게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다른 옷 입기 약속으로 돌아가 보면, 연초에는 열심히 지키려 노력했다. 만나기 전에 서로 약속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고, 오늘 입을 옷을 혹시 지난번에 입고 나갔는지 헷갈려 미리 물어보기도 했다. 만나면 오늘은 꼭 한 벌 성공하자며 함께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쇼핑에 혈안이 되기도 했다. 그것도 점차 시들해져 만나기 전 “혹시 상의와 하의 중 하나만 중복 아니면 되지 않을까?”라고 슬쩍 묻기 시작했고 점점 우리의 다짐은 잊혀갔다. 아니, 사실 잊지 않았는데 서로 그냥 잊은 척 넘어간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그랬는데 친구의 경우는 어땠는지 굳이 묻지 않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주말 친구들과의 약속에는 뭘 입고 나가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