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하지 말고 칠판을 보세요. 어차피 적어봤자 다 잊을 거잖아. 여러분은 잊어버리려고 적는 것 같아요."
때는 2010년, 신촌의 한 토익 학원에서 강사님이 했던 말이다. 제발 필기하지 말고 칠판을 보고 강의를 들어달라던 선생님이 설명했던 토익에 자주 출제되는 형용사는커녕 강사님 이름도 잊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저 말은 생생히 기억난다. "기억하기 위해 적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해 적는다"라니.
1.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미식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기보다는 뭐랄까 '음식'과 '먹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을 기억하고자 음식 사진을 찍긴 하지만 휴대폰 사진첩을 정리하다 보면 지우기도, 남기기도 애매해진 음식 사진 때문이다. SNS에 게시했으니 맘 놓고 핸드폰에서 사진을 지워버리는 것인데 생각해보니 내가 포스팅을 하는 이유도 결국은 '삭제'가 목적은 아니었을까.
2.
요즘 들어 부쩍 엄마가 뜬금없이 전화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예컨대 내가 근무 중인 것을 알면서도 전화하여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해 달라는 말을 하신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살 수 없으니 집에서 이야기해도 될 것을 왜 굳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생각났을 때 말하지 않으면 잊어서' 란다. 서른을 갓 넘긴 나도 무언가 하려고 핸드폰을 켰다가 원 목적을 잊고 유튜브만 한 시간을 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으면 아 맞다! 뭔가 하려고 핸드폰을 켰는데 그게 뭐였더라.. 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게 일상인데 나보다 30년을 더 산 엄마는 오죽하겠는가. 우리 엄마의 경우도 기억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마음 편히 잊으려고 내 머릿속에다 대신 저장하는 것이다.
3.
얼마 전 친구와 한식 다이닝에 다녀왔다. 음식이 나오면 재료와 먹는 법 따위를 직원이 친절히 설명해주는데, 나는 잊지 않으려고 하나하나 집중해서 들었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친구도 블로그에 세세한 정보를 담기 위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동영상 촬영을 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이게 뭐였더라...? 하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완도 곱창김! 미나리 간장에 찍어먹으랬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마도 친구는 동영상을 찍는데 집중해 직원의 말을 흘려 들었을 것이고, 혹시 모르면 나중에 동영상에서 찾아보면 되니, 나보다 더 집중하고 기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망각을 위해 기록한다는 말이 정설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늘도 망각하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동시에 망각하기 위해 기록하고 있다. 경주 석장동 등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암각화는 '고대인의 소망을 바위에 새긴 것'이라는 것이 학설이다. 어쩌면 그들도 고된 사냥과 다산이라는 삶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벗어나기 위해 바위에 그림을 그린 건 아닐까.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