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늘도 2만 보

by 해야

역시 내게 다짐이라는 것은 어기기 위한 것인가. 이번 여행은 분명 별다른 것 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쉬고 자연 풍경을 보며 힐링하려 했건만 자꾸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한국인은 여행도 일처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일은 안 하는 백수지만 기본 업무 자세에 열심과 성실이 깔린 한국인으로서(면접관들이 이런 내 모습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하루를 꽉 채워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변명을 하자면 여행지에서 몇 시간은 평생 기억할 추억거리가 된다. 아침에 한두 시간만 일찍 일어나면, 저녁에 한두 시간 늦게 들어가고 덜 자면 무언가를 하나 더 할 수 있는 시간이 되고, 그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특별한 경험이 되니 가성비로 따졌을 때 무척 훌륭한 투자인 셈이다. 좋게 말하면 앞과 같고 나의 경우 어릴 적부터 강요받아온, 본전을 뽑아야 잘 놀았다는 생각에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된다.


대학시절 강릉으로 엠티를 갔을 때 새벽에 혼자 일어났다. 어젯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거실을 정리하는데 내 소리에 깬 동기가 일을 거들었다. 청소를 마치고 동기와 함께 숙소 앞 바닷가에 가서 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다. 나뭇가지로 모래에 글자도 쓰고,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반짝이는 햇살이 가득한 바닷가에서의 기억을 종종 꺼낸다.


대만 여행을 갔을 땐 일행과 싸운 적이 있다. 3박 4일 일정이라 여유가 없으니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동하려 했는데, 상대는 왜 쉬려고 여행 와서도 빡빡하게 움직여야 하냐며 늦잠을 자고 점심때쯤 나가길 원했다.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건 휴양지에서나 할 일이지 타이베이는 도시인데? 결국 크게 싸우고 나는 먼저 나갔다. 당시만 해도 느긋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도대체 왜 가는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열정과 에너지로 찼던 시기였기에 싸웠지만 지금은 머리로는 이해한다. 아직도 몸속 깊은 곳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떠나기 전엔 도보로만 이동 가능한, 숙소 앞 한적한 바닷가에서 멍 때리고 오션뷰 카페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려 했건만 현실은 매일 밤 다음날은 어딜 어떻게 가야 야무지게 여행을 하나 루트 짜느라 잠을 잘 못 잔다. 계획형 인간에게는 계획 없는 여행이 휴식이 아니라 고통이다. 정보도 없이 전날 혹은 당일에 급히 세운 계획이라 엉성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뚜벅이 신세라 차로 이동하는 것에 2배의 시간이 든다. 밤에 혼자 다니지 않고 늦어도 7시에는 호텔로 돌아가려다 보니 하루 종일 2군데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한다. 한 것도 없는데 시간만 자꾸 가는 것 같아 속이 타는데 여행 4일 차에 내 걸음 수를 보곤 헛웃음이 난다. 첫날 26,122걸음, 4일 평균 19,946걸음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4월에 홀로 다녀온 2박 3일 경주여행에서는 첫날 23,398보, 둘째 날 38,606보(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마지막 날 21,586보를 기록한 전적이 있다(다녀와서는 몸살이 나서 드러누웠다). 경주에 가면 가보고 싶었던 예쁜 카페는 지도에 저장만 해놓았을 뿐 2박 3일 동안 단 한 군데도 가지 못했다. 친구들과 여행하면 예쁜 카페에서 쉬면서 시간 보내는걸 참 좋아하는데 혼자가 되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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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06 걸음을 걸은 경주 여행(좌), 이번 제주 여행 4일차 기록(우)


제주에서 첫날 여행지는 제주곶자왈도립공원과 오설록 티뮤지엄, 이니스프리 티하우스에 갔다가 동문시장에서 저녁을 먹는 코스였다. 비가 많이 오고 날도 추웠는데 제주에 도착해 쉴 법도 하건만 '비 오는 날의 숲은 더 운치 있지~' 하며 굳이 비를 맞아가며 숲을 한 시간 넘게 걷고, '근처까지 갔는데(곶자왈도립공원과 오설록티뮤지엄은 차로 6분 거리, 버스로 4정거장이다) 오설록은 가야지!' 하고 야무지게 우중 녹차밭 투어까지 하고 돌아오니 무려 26,122보를 기록한 것이다.


왜 나는 쉬지 못하는가. 뚜벅이라 버스 정거장까지 걸어야 해서인 탓도 있겠지만(사실 정류장까지 10분 넘게 걸어본 적은 없다) 그래도 또 많이 움직여버렸다. 뭐든 잘하지는 못해도 열심히만 하는 내가 또 여행도 열심히 해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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