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암막커튼을 걷었다.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거셌던 어제와 달리 햇빛이 쨍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일기예보를 보니 이번 주 내내 비나 구름이 예상되는데 오늘 하루만 화창하다. 날씨운 없는 내게 귀한 날이다. 그래서 어제 새벽 급하게 스노클링 호핑투어를 예약했다.
스노클링은 3년 전 태국 파타야에서 한 번 해본 적 있다. 픽사 영화 <니모를 찾아서> 니모 캐릭터 흰동가리도 보고, 각종 열대 물고기에 흥분해 대왕 성게 가시에 발을 깊이 찔렸다. 파타야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라는 성게는 크기도 클뿐더러 가시가 족히 50센티는 되는 것 같았는데 가시 여러 개가 한 번에 발에 쑥 들어왔다가 놀라 파닥거리자 빠졌다. 순식간에 어찌나 많이 찔렸는지 발에는 작게 동그랗고 검은 자국이 발바닥 전체에 열다섯 군데 정도 남아 있고 빨갛게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안전 요원의 응급처치를 받고 나는 한 시간 넘게 남은 시간을 일행이 신나게 스노클링 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배 위에서 구경만 해야 했던 아픔이 있는 스노클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것도 제주 바다에서! 파란 제주 바다에 시원하게 몸을 던져보고 싶은 충동은 바다를 볼 때마다 들었지만 늘 발만 살짝 담그고 돌아가야 했다. 성인이 된 후에 바다에 들어간 일은 손에 꼽는 것 같다. 특히 제주 바다는 어릴 적 가족 여행으로 왔을 때 이후 한 번도 입수 경험이 없다. 스노클링은 가까운 바다에서 혼자 물안경을 끼고 해도 되지만 안전상의 문제도 있고, 먼바다 깊숙한 곳에서 다양한 어종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투어를 신청했다.
대표 관광지는 아니기에 관광객 입장에서는 투어가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 같은 사계항에 도착했다. 스노클링도 그렇지만 고즈넉하고 조용한 어촌마을의 분위기를 가득 담은 사계항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였다. 스노클링이 준 또다른 선물이다. 프랜차이즈 카페와 숙박업소가 줄지은 유명 해수욕장보다 훨씬 좋았다. 정류장에서 내려 바닷가로 걸어가는 마을 초입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운 산방산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산 주변에 하얀 구름을 얹어놓은 모습이 신비롭고 아름다워 그 모습을 보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어촌마을길을 10분 정도 걷다 보니 사계항이 나왔다. 사계항 역시 아름답고 조용했다. 몇 가족들이 해수욕을 하고 있는 해안가를 지나면 작은 항구에 배가 옹기종기 정착해 있었다. 옆으로는 까만 모래의 용머리 해안이 절경을 자랑하고, 그 옆 언덕에는 벤치에 앉아 하루 종일 보고 싶은 파란 바닷물이 일렁거렸다. 여행하면서 욕심에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 장소를 옮겨 다니곤 했는데 이 날 만큼은 오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사계항에 머물렀다. 점심은 물회, 저녁은 뿔소라 정식으로 두 끼를 해산물로 야무지게 챙겨 먹고 일몰까지 보고 돌아갔다.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겨 본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으로 10분 정도 보트를 타고 이동했다. 보트 안에서 선장님이 보트 바닥에 모래를 봐 달라고 했다. 앞 팀이 흘린 모래인데 이렇게 되면 모래가 자꾸 유출되니까 이따가 물놀이가 끝나고 배에 다시 탈 때 몸을 한 번 털고 타 달라고 부탁했다. 자연을 수단으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공존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10분 정도 배를 타고 이동해 섬 근처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또 이동했다. 스노클링 장비를 받고 방목되었다. 내가 예상했던, 바다 한가운데에서 퐁당 입수하는 투어는 아니었다. 섬 해안가에 내려서 해안가에서 정해진 시간만큼 스노클링을 자유롭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혼자 장비 차고 하는 것과 다른 점이라면 안전 요원이 있다는 것, 본섬과 떨어진 섬에서 진행되므로 조금 더 다양한 어종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6월 초의 바다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워터레깅스를 따로 챙겨갔기에 슈트를 입을 생각은 없었는데 여행사 직원이 바닷물이 아직 많이 차다고, 냉탕 정도 온도라는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추가 요금을 내고 슈트를 빌렸다. 정말 잘한 일이었다. 처음 몸에 물이 닿았을 때 너무 차가워 깜짝 놀랐다. 물속에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그래도 제주 바다에 몸 전체를 담그고 헤엄칠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시원하고 개운했다. 사실 나는 내 힘으로 어디로든 떠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은 어딘가 얽매여 무엇도 할 수 없이 갇힌 느낌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그저 후련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어 더 행복했다.
함께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와 물장구도 치고, 같이 손 잡고 바닷속에서 헤엄치는데 나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물속을 누볐다. ‘나 정말 혼자 잘 노는구나.’싶어 나도 웃겼다. 누가 그랬는데 네가 혼자인 이유는 '혼자 너무 잘 놀아서'란다. 동의한다. 배 위에서는 혼자 왔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말은 안 붙이지만 자꾸 흘긋흘긋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예쁜 바다를 많이 보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혼자 가는 경우가 흔치 않은지 투어 직원이 계속 챙겨주고, 말도 많이 걸어주었다.
바닷속에는 이름은 모르지만 가자미처럼 납작한 생선, 작고 줄무늬가 있는 생선 등 다양한 물고기가 있었다. 태국에서처럼 물속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주거나 가이드가 함께 수영하며 이런저런 포인트를 알려주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스노클링이 끝나고 해녀 삼촌과 우연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기뻤다. 유튜브를 통해 제주 사투리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할머니 나이대의 해녀 삼촌이 하시는 말은 정말 알아듣기 어려워 되물어야 했다. 진짜 제주를 경험한 기분이었다.
저녁은 점심에 갔다가 웨이팅이 길어 먹지 못했던 해녀가 매일 잡은 뿔소라로 차린다는 뿔소라 정식집에 갔다.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재빨리 들어갔더니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었다. 뿔소라 솥밥부터 뿔소라 꼬치, 뿔소라장, 딱새우장, 톳장, 옥돔구이, 흑돼지볶음, 톳전 등 제주스러운, 해산물로 가득 찬 영양가 있는 밥상을 받았다.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나 걱정스러울 정도로 반찬이 많이 나왔다. 밥이 아니라 약이다, 생각하고 물놀이로 소진한 체력을 보충하고자 욕심 내서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열심히 끝까지 다 먹었다. 이래서 여행기간 평균 하루 2만보를 걸었는데도오히려 2kg가 찐 것 것 같다. 자꾸 감량은 못 하고 증량만 한다. 드라마 tvN <식샤를 합시다> 주인공 구대영처럼 싹싹 비운 그릇을 찍은 인증샷을 남기고 싶었는데 깜빡했다. 아쉽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일몰까지 30분 정도 해수욕장에 앉아 바다 멍을 때렸다. 조금 전까지 바닷물 속에 있다가 나왔는데도 바다를 보니 또 들어가고 싶다. 내가 있던 곳보다 더 깊은 곳으로. 바다가 너무 넓고, 너무 파랗고, 너무 예쁘다. 저 푸른 물속에 퐁당 들어가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다. 이번 여행을 통틀어 혼자 다니는 사람, 특히 여자는 거의 못 봤는데 이 날 해 질 무렵 해수욕장에서 혼자 온 여자를 세명이나 만났다. 한 명은 나랑 같은 식당에서 밥 먹고, 앞뒤를 다투며 같은 길을 걸어 해수욕장으로 갔다. 괜히 반갑다. 저 사람들도 즐겁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으면 좋겠다. 어쩐지 응원하게 된다.
일몰을 보고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초짜 뚜벅이라 몇 번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만 확인하고 가 버스를 무려 29분이나 기다렸다. 버스 도착이 임박하자 도민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하나둘씩 나타났다. 여행 마지막 날 즈음에는 나도 버스 시간표 보는 법이나 제주버스정보앱이나 네이버지도에 도착 예정이 나오지 않는 버스 도착 정보를 예상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름 효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유튜브를 한다면 이 노하우를 풀어 조회수를 올릴 수 있겠지(감히 육지것이)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어제 사다 놓은 카라향을 하나 먹고, 방음이 잘 되지 않는 호텔에서 옆방 사람의 생활소음을 들으며 다음날 아침까지 꿀잠을 잤다. 제주 바다에서 놀고, 바다에서 난 것들을 먹고 제주 바다 속에서 보낸, 진짜 제주를 조금이나마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