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보물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by 해야

어제의 쭈뼛쭈뼛함은 버리고 당당히 걸어 들어가 외친다. “10시 30분 예약이요. 뒷번호는.. ” 이곳은 제주 3대 김밥이라 불리는 가게다. 당일에는 오전 일찍 가서 예약하면 오후에 먹을 수 있고, 전일 예약하면 다음날 원하는 시간에 김밥을 받을 수 있다. 예약 시간에 픽업을 오지 않으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예약이 취소된다. 운 좋게 바로 취소분을 샀다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는 시간과 정성을 어느 정도 들여야 맛볼 수 있는 김밥이다. 마침 숙소에서 무척 가깝기도 하고 시간도 여유 있는 편이라 어제 미리 예약해둔 김밥을 픽업했다. 나는 분명 다른 곳엔 없는 걸 시켜봐야지 하고 깻잎을 주문했는데 참치를 주신다. 너무 바빠 보여 항의하기도 좀 그렇고, '사실 참치김밥을 좋아하니까, 단백질이니까 오히려 좋아'하고 그냥 받아왔다. 난 옛날 사람이라 김밥에는 칠성사이다를 함께 먹어줘야 하지만 여긴 제주니까 제주올레시장에 들러 천혜향주스를 샀다. 3천 원짜리 주스와 4천 원짜리 주스의 차이를 물어보니 시럽 유무라고 한다. 시럽 없는 주스를 넣은 검은 비닐봉지를 앞 뒤로 흔들며 신나게 호텔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니 신나서 한 발 뛰기도 한 것 같다.


평범한 것 같지만 약간의 특별함이 있는 맛이다. 역시 아주 특이하고 다른 것보다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 자신만의 무언가를 가미해야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것 같다. 자소서 쓸 때나 면접 볼 때 나는 흔해빠진 평범한 김밥이겠지. 나만의 강점을 뭐라 표현하면 이 김밥 같아질까. 지난주에 면접을 본 늦깎이 취준생은 슬프게도 김밥을 먹을 때도 이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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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주문 수량이 2줄이라 대표 메뉴와 깻잎을 주문(했는데 받고 보니 참치였지만 맛있게 먹었다)했다. 내 적정량은 1줄이라 역시 2줄은 버겁다. 꾸역꾸역 반 조금 넘게 먹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갔다. 상하지 않길 바라면서. 오늘 방문할 곳은 쇠소깍, 천지연폭포, 새연교다. 김밥 예약 시간 때문에 점심이 지나고 시작하는 일정이라 간소하게 계획했다.


쇠소깍은 하효동과 하례리 사이에 흐르는 효돈천 하구다. 버스를 타고 쇠소깍에 가는 길,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 여기저기 하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뜻밖의 제주스러운 풍경에 눈이 커다래졌다. 기념품으로 유명한 하효맘감귤과즐이 여태 ‘하효’라는 아이 어머님이 만든 과즐인 줄 알았는데 이곳을 지나며 그 하효가 이 하효, 즉 감귤이 많이 나는 이 지역명인 것을 깨닫고 혼자 길에서 이마를 쳤다. 혼자 대단한(?) 발견에 기뻐하며 쇠소깍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배를 탈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냥 입을 떡 벌리고 쇠소깍 근처를 걸었다. 아 이게 무슨 신선이, 선녀가 내려와 목욕할 것 같은 곳인지. ‘신비의 섬, 제주’ 슬로건은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찰떡이다. 신비롭고 여유로운 풍경에 빨려들 것 같다. 할 말을 잃었다. 일행이 없으므로 내 입을 다물어줄 이가 없어 계속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다. 혼자 카약은 못 타더라도 전통배라도 탈까 고민했다. 나도 신선처럼 물 위를 노닐고 싶고, 배를 움직이는 저 직원이 쇠소깍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그냥 탈걸, 왜 안 탔지 후회 중이다. 막상 타보고 별 거 없다고 후회하더라도 타고 싶은 마음은 나이 들어도 똑같다. 할까 말까 역시 할 때는 해보는 게 낫지.


IMG_0262.JPG 쇠소깍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지 못해 한탄스럽다


쇠소깍 물줄기를 따라 까만 모래가 신기한 쇠소깍 해변까지 구경하고 아까 내렸던 곳으로 다시 걸어가 버스를 탔다.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가느라 땀을 흘리며 뛰어갔는데 또 허망한 일을 겪었다. 버스가 시간에 맞춰 도착은 했으나, 그곳이 종점이라 한참을 거기 서서 쉬었다. 초보 뚜벅이의 실수다. 땀을 식히며 또 기다림을 배웠다.


절벽에 위치한 올레길을 걸으며 주변 호텔을 구경했다. 서귀포항 근처로 오션뷰 숙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적하고 초록초록한 길이 안정과 행복감을 준다. 길을 따라 지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바다가 보였다. 그리고 가는 길에 천지연 폭포로 살짝 방향을 틀어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사실 그곳에 천지연 폭포가 있는 줄은 몰랐다. 새연교로 향하다가 바로 옆에 천지연 폭포가 있어 '이번 여행에서는 폭포를 가본 적이 없으니까'하고 그냥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우연이 가져다 준 작은 행복이다. 폭포물 떨어지는 소리, 물이 아래로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입구부터 돌하르방을 예쁘게 꾸며놓고, 폭포로 가는 길은 초록잎으로 가득 찬 아기자기하고 예쁜 곳이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옷을 맞춰 입고, 베일을 쓰고 셀프 웨딩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폭포 앞에서 커플이 포즈를 취하자 사람들이 박수치고 환호해주었다. 신부와 신랑은 쑥스러워하며 웃고 카메라를 들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IMG_0300_복사본.JPG 천지연 폭포


새연교 역시 별생각 없이 간 곳인데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어딜 갈까 하다가 호텔 로비에 새연교가 서귀포 대표 관광지라고 크게 쓰여있길래 정한 코스였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도민처럼 노트북을 하는 다소 이상한 로망도 있었으므로 1.12kg이나 되는 노트북까지 하루 종일 이고 지고서. 잠깐 구경하고 미리 알아본 오션뷰 카페에서 일몰을 보며 노트북으로 다음 일정을 정하고 호텔을 예약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경치에 취해 예약이고 뭐고 포기하고 주변을 산책했다. ‘와 여기 뭐야, 이런 곳이 호텔 바로 옆에 있었어.’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올 만큼 절경이었다. 역시 뭐든 섣불리 판단 말고 겪어보고 말해야 한다. 바다는 눈이 부시게 파랬고, 바람이 세서 파동도 크고 파도도 높아 더 절경이었다. 새연교에 올라서 보는 바다도 멋졌고, 방파제 옆길도 예뻤다. 방파제 앞에 캠핑카를 세워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런 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다니. 새연교도 천지연도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는데 두 시간씩 힘들게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니(왕복 3-4시간이다). 보물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서연교 끄트머리에서는 섶섬, 문섬, 범섬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올레길을 따라 새섬을 돌아볼 수 있는 코스도 있었는데 어쩐지 조금 무서워서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참 아쉬웠다. 새연교는 밤에 불이 들어와서 야간에 봐도 예쁘다는데 밤에 항구 쪽에 혼자 갈 용기는 없다. 일행이 있었으면 야간 산책도 하고, 밤바다도 보고 조금 더 알차게 놀았을 텐데. 새연교 근처는 아침 산책코스로도 좋다, 일출 명소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역시 무서워서 포기했다. 처음으로 혼자인 게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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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항과 새섬공원


노트북은 무겁게 왜 들고 왔나 어이없어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자꾸 누가 뒤에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둑어둑하긴 하지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인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어폰을 끼고 운동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는데,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자꾸 쳐다보고 따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길가에 있는 과일 가게에 멈춰 한참을 아주머니와 이야기하고 과일을 사서 다시 출발하려는데 내 앞을 아까 질러갔던 분이, 나랑 한참 거리 차이가 나야 하는 분이 가게 앞 코너에서 바다를 보며 서 있었다. 태연한 척 경보실력을 뽐내며 빠르게 걸었다. 티나지 않게 하려고 코너를 돌고 나서 미친 듯이 뛰었고, 지도에서 알려주는 길 말고 돌아가더라도 사람 많은 곳으로 뛰어갔다. 한참을 뛰다가 뒤돌아보니 아무도 안 보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 호텔로 후다닥 들어갔다. 노트북과 아까 산 과일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뛰었다. 습도 높은 날씨에 언덕길을 뛰었더니 땀이 한 바가지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이기를, 무고한 시민을 혼자 오해하고 혼자 열심히 유산소 운동을 한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급히 들어오느라 저녁거리도 사지 못한 바람에 배가 고팠다. 다시 나가고 싶지 않아 점심에 먹던 김밥을 꺼냈다. 시그니처 김밥은 괜찮았는데 참치김밥은 마요네즈 탓인지 상한 냄새가 나서 그냥 버렸다. 음식을 버리는 것은 언제나 아깝고 죄책감 들지만 이렇게 배고프고 간절할 때는 더하다. 천혜향 주스를 사러 갔을 때 시장에서 산 오메기떡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떡 두 개 먹으면 그래도 배가 좀 차겠지 싶었는데 단호박 떡은 괜찮았는데 팥 오메기떡에서 시큼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 10시 넘어 시장에 가서 사고, 11시도 안 되어 방에 돌아와 바로 냉장고에 넣었는데 상하다니. 이건 상한걸 판 것이 틀림없다. 배고픈데 정말 속상하다. 김밥 옆에 떡을 버리고 아까 산 과일을 깠다. 속이 다 말라있다. 오래된 과일이다. 이런 걸 팔다니, 게다가 싸지도 않은데. 오늘 저녁 식사는 정말 조촐하고, 화가 난다. 그러면서도 많이 걸었는데 저녁을 이렇게 간소하게 먹으면 살이 좀 빠지지 않을까 은근 기대했다.


이 정도만 먹고 내일 아침을 거하게 먹으려고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호텔 1층에 편의점에 간식거리를 사러 갔다. 핸드폰 충전 중이라 그냥 방에 두고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아 지금 몇 시지? 8시는 아니겠지. 빨리 갔다 와야지' 하고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을 봤는데 8시 00분이었다. 맞춰놓은 알림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 골목식당에 나온, 제주의 핫플 연돈 예약은 영업일 전날 저녁 8시에 시작한다. 제주에서만 접속이 가능해 제주에 도착해서부터 시도하고 있는데, 5년 쓴 느린 내 핸드폰으로는 무리인지 실패였다. 뒤늦게 접속해보았지만 이미 8시 1분. 예약 마감이다. 곧 서귀포를 떠나 제주시로 갈 예정이라 기회가 많지 않은데. 어리석게 과자와 연돈을 맞바꾸다니. 끝까지 되는 것 없는 저녁이구나 생각하며 편의점에서 사 온 허니버터 칩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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