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처럼 연못 주변을 두르고 있는 하귤나무에는 내 두 손으로도 다 감쌀 수 없을 만큼 큰 하귤이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다. 그 뒤로는 계속 뒷걸음을 쳐도 프레임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키가 큰 야자수가 있다. 야자수 옆으로는 커다란 돌하르방이 연못을 건너는 다리 입구를 지켜주듯 양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국적인 연못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잔디마당과 동양 최대 크기의 법당이라는 웅장한 대적광전이 등장한다. 대적광전 입구에서 뒤돌아보면 서귀포 바다가 펼쳐진다. 글만 보면 동남아시아의 어느 절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약천사 풍경이다.
제주도에서 절을 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우연히 약천사 사진을 보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 뚜벅이 여행에서 중간에 코스를 하나 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희생이 따른다. 번화가에서 관광지로 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중간에 하차하여 다른 곳을 들른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야자수가 어우러진 약천사 사진을 보고 나니 꼭 실물을 보고 싶었다. 템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길래 숙소를 옮길 겸, 이번 여행 테마와도 잘 맞겠다 템플스테이를 하려고 했는데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었다. 열흘 뒤에나 예약이 가능했다. 즉흥 여행의 아쉬운 점이다. 괜찮은 숙소 예약은 이미 끝났고, 가파도를 가고 싶었지만 배편도 모두 예약 마감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잠깐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약천사로 향했다.
대적광전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고, 신도들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기 조심스러웠다. 대적광전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니 뒤에서는 예불드리는 소리와 목탁 소리가 잔잔히 울리고 눈앞에는 서귀포의 파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시선을 조금만 아래로 돌리면 쏟아지는 햇살 아래 푸른 잔디와 야자수, 멀리서 보면 동글동글 탁구공 같은 하귤이 잔뜩 열린 하귤 나무가 보인다. 잠깐만 쉬어 가려고 했는데 마음의 평온을 느끼며 그곳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제주 여행을 하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이 많았지만 전부 자연을 마주했을 때였다. 자연과 건축물, 인공 조경이 이렇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었다. 다음에 제주에 올 때는 꼭 약천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약천사는 봄부터 가을까지 물이 솟는 샘물과 사철 흐르는 약수가 있는 연못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량 내 모든 물을 약수로 사용하고, 참배자 누구나 약수를 마실 수 있다고 하는데 전혀 몰랐다. 감염병 때문에 마시진 않아도 구경은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다시 가야 할 이유 하나 더 늘었다.
그나저나 제주는 절도 오션뷰구나. 정말 제주스러운 장소다. 전에 친구들과 태국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바다에 가고 싶은 서울 친구들의 제안에 통영과 울산 출신 친구들이 “왜 태국까지 와서 바다를 보러 가냐. 바다는 집 밖에만 나가면 있는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땐 집에 가다가 심심하면 바닷가로 가서 놀곤 했다고 한다. 내륙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바다를 사면에 품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창문 열면 옆집 건물 뷰인, 그나마도 어디선가 자꾸 하수구 냄새가 올라와 창문을 열지 않고 에어컨을 틀고 지내는 내 서울살이가 서글퍼진다.
집으로 돌아가면 또 생각날 바다를 마음껏 눈에 담기 위해 약천사를 떠나 중문관광단지로 향했다. 버스 배차 시간 때문에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걸어서. 이것이 진정한 뚜벅이의 여행이요, 하루 2만 보의 비결이다. 버스로 23분(그러나 도착 예정 정보 없음), 도보로 45분이다. 걸음이 빨라 지도 앱에서 안내하는 것보다 항상 시간이 덜 걸리므로 35-40분을 예상하고 떠났다.
해안가 따라 직진이라 길 찾기가 어렵진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금방 지치고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리도 아프고, 갑자기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간절했을 때 정말 오아시스처럼 우유갑을 본떠 만든 것 같은 건물의 카페가 나타났다. 무작정 들어가 보았는데 한적한 것도 마음에 들고, 현무암으로 장식한 제주스러운 내부 인테리어에, 보목항이 한눈에 보이는 창이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먹고 싶었던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무려 한라산에서 자연 방목한 젖소의 착유로 만드는 가게였다. 아이스크림 말고도 제주의 제철 과일을 활용한 디저트도 팔았는데 왜 먹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후회 중이다. 소프트아이스크림 위에 올라간 감귤 진피 정과가 오도독오도독 상큼하게 씹히며 다시 걸어갈 힘을 주었다.
한적한 대포항 풍경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던 순간이 이번 여행에서 손꼽히는 선물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평소 행복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데 이 순간에는 속으로 ‘아, 행복하다.’라고 열번쯤 외쳤다. 카페 인테리어도, 뷰도, 맛도 그냥 모든 게 완벽했다. 찾아보니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유명세를 타지 않은 곳 같은데 다시 갈 때도 지금처럼 여유롭고 아름다운 공간이길 바라기도 하고, 이런 카페는 더 유명해져야 할 것 같기도 한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카페에서 나와 가볍게 대포항을 둘러보고 중문 관광단지까지 다시 열심히 걸었다. 몇 년 전 친구와 중문에 갔을 때 우연히 일몰을 보았던 장소를 찾아서. 바다 위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이제 내일이면 제주시로 간다. 서귀포는 당분간 못 보겠구나’ 아쉬워하며 떠난다. 여행 중 한 어촌 마을에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 기념탑을 보았다. 이런 바다와 하늘이 품어주는 곳에서 사는데 사람 마음도 아름다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