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암막커튼을 걷고 날씨를 확인한다. 새벽에는 비가 왔는데 8시가 안 된 지금은 햇살이 쨍쨍하고 구름 한 점 없다. 8층, 오션뷰 방을 배정받아 앞에 크게 가리는 건물 없이 큰 창 가득 하늘도 보이고, 바다와 문섬도 보인다. 친구들 단톡방에 창문에서 본 제주바다 뷰를 보내고 ‘나름 오션뷰’ 라고 했더니 바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펜으로 건물 사이 틈틈히 보이는 바다 위치를 체크해서 다시 보내줬다. 친구들은 "이제야 좀 식별 가능하다", "여기 그냥 서울 아니냐", "아니다, 바다가 보이긴 하니 인천이나 부산인 것 같다"며 놀렸지만 이 정도 뷰라면 눈물나게 감사하다. 방 창문으로 하늘이 보인다는 것, 좀 집중해서 보아야 하지만 파란 바닷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서귀포에서 머무는 동안 양치할 때는 항상 이 창 앞에서 멍하니 문섬을 보곤 했다. 일상을 바다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제주 사람에게는 흔한 것이겠지만 이 육지것에게는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바다를 보는 귀한 3분이다. 비 오는 날은 빗방울이 창문에 붙었다가 흘러내리고 맺히는 과정을 보면서, 맑은 날은 그저 파아랗다는 말 밖에는 뭐라 설명해야하는지도 모르겠는 맑은 하늘을 보면서 칫약의 화함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때까지 이를 닦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한 것은 ‘바다 멍’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파랗게 일렁이는 바다만 보아도 그저 좋았다. 해변에 앉아서, 해안가를 산책하며, 해안도로를 러닝하면서도, 오션뷰 카페에 앉아 음료를 마시면서, 이동 중 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바다가 너무 넓고 너무 크고 너무 파래서 지겹지 않았다. 끝없이 치는 파도는 일정한 패턴을 갖기도 하고, 그 안에서 변화를 주기도 했다. 파도 치는 모습, 파도 소리, 모래 위로 파도가 부스러지는 소리, 저 멀리서 햇빛을 받아 파랗게 일렁이는 모습, 크고 작은 배들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 하늘과 경계를 이룬 모습 등 보고 있으면 어딘가 위로 받는 느낌이다.
지난번 제주 여행에서 이중섭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해설가 선생님이 해설 중 “저는 제주를 떠나서는 못 살아요. 저 서귀포 바다가 그리워서 못 살아요.”라고 했던 말이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젊을 적 목포로 잠깐 떠났었지만 저 서귀포 바다가 너무 그리워 결국 다시 제주로 돌아와 평생을 제주에서 살았다는 해설가님의 말에 진심과 서귀포 바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번 여행 마지막 날, 유난히도 날씨가 좋았다. 계속 흐리고 비가 오더니 떠나는 날 이러는건 정말 반칙 아닌가. 야속하다. 아니, 떠나는 날이라도 맑은 날을 느끼라고 준 선물인가. 새벽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 꿀잠을 자버렸는데 날이 너무 맑다. 이럴줄 알았으면 새벽에 해안도로 러닝을 한번 더 하는건데. 새벽에 일어나볼껄 너무 아쉽다.
이 날 일정은 아침 요가 수업을 하고 시내에 있는 오션뷰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신 뒤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15시 10분 비행기이니 여유 있는 일정이라 생각했다. 카페에서 딱 20분만 있었어야 하는데 하필 내가 나가기 5분 전에 창가쪽 자리가 났다. 예전에 그 카페에 갔을 때에도 창가쪽에 앉지 못해 이번엔 꼭 앉아보고 싶어 시간을 쪼개 간 카페였다. 아쉬운대로 의자 틈으로 반쯤 바다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내 바로 앞 자리가 난 것이다. 재빨리 자리를 옮겨 사진을 찍고, 남은 음료를 마시며 탁 트인 하늘과 바다를 마음껏 눈에 담았다. 이제 마지막이니 5분만 더, 5분만 더 하다가 계획한 시간보다 늦게 출발하게 됐다.
숙소 근처에 있는 한치물회 맛집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전날 한치잡이 배를 보고, 떠나기 전에 제철인 한치를 맛보고 가겠다며 식탐을 부린 계획이다. 가게 간판과 한 프레임에 담기는 줄 지어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보고 철렁한다. 나는 기다릴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유명한 맛집이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니 17번째 번호표를 준다. 제철 한치회를 포기하고 대신 점심으로 할애했던 시간 만큼 제주 바다를 원없이 보고 가기로 했다.
도두항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해안도로를 목 아프게 쳐다봤다.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에도 애닳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바다도 아닌데, 마지막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집착했다. 내가 서울에 가야 할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갈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주에 있을 때 한 곳의 회사로부터 서류탈락 통보를, 지난주 면접 본 기관으로부터 최종면접탈락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당장 돌아가서 할 일도 없었다(그러다가 숙박비를 생각하고 조용히 비행기를 탔다). '한 달 살이 하고 싶다. 정말 가기 싫다' 생각하며 비행기를 탔다.
사실 나는 5달 동안 거짓말쟁이였다. 34살에 내 의사에 반한 퇴사 후 좌절과 절망에 빠졌다.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고 울기도 하고, 우울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 근황 얘기를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쩌다 회사 얘기가 나오면 대충 다른 대답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퇴사했다는 얘기를, 사유가 계약만료고 나는 또 미취업, 취업준비생이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 싫었다. 친구들은 이제 중간관리자급이 되었는데 나는 또 이러고 있다니 못난 내가 싫고 비참해서 말할 수 없었다. 자괴감에 빠져 근황을 물을까봐 가족모임도 가지 못하고 요가원만 다니며 명상을 하고 또 했다. 재취업을 하고 나서 “나 퇴사했어”가 아닌 “나 이직했어.”라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아 미뤘는데 벌써 6달째 취업은 되지 않고, 거짓말 기간만 늘어나고 있었다. 거짓말 정말 싫은데.
제주 여행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친구들이 제주에 갔냐고 물었다. 여행 기간이 평소보다 길다보니 며칠 다녀왔냐, 휴가 이렇게 많이 쓸 수 있냐는 질문도 한다. ㄱ아무렇지 않게 “나 퇴사했어. 몇 달 됐는데 말 못했어.” 라고 말했다. 제주로 급 떠났다는 나의 말에 “아무리 쉴 때라도 생각만 하고 못하는건데 대단해. 멋지다”, “그동안 마음고생 했겠네, 그래도 제주에서 힐링했다니 너무 다행이다.”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친구들에게도 말 못할 정도로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다. 바다만 몇 시간을 보니, 제주 바람을 양껏 쐬고 나니, 초록빛을 한없이 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괜찮아졌고, 말할 용기가 생겼다. 이건 분명, 제주 바다가 하영 넓고, 크고, 파랗고, 예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