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시작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 창 밖으로 평소 가보고 싶었던 유명 디저트 가게를 보아 버린 건. 홀린 듯이 버스에서 내렸다. 줄이 꽤 길었고, 내 순서가 오기까지 30분 정도 기다렸다. 그 사이에 내가 타야 할 버스는 2대나 가버렸다. 디저트를 사고 다시 버스정류장에 돌아가니 다음 버스는 20분 후에 온다는 알림이 흐르고 있었다. 이 푸딩을 사느라 1시간이나 지체해 버린 것이다. 저녁 7시에 요가 수업을 예약해두었는데. 선생님과 1대 1 수업인데. 마음이 급하다. 20분 후에 오는 버스를 탄다면 조금 촉박하지만 그래도 갈 수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차가 막혀 원래 도착 시간보다 40분이나 늦어졌고, 결국 요가 수업을 내일 아침으로 바꿨다. 요가 수업 때문에 내일 아침에 계획했던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이걸 왜 샀을까 후회막심이다.
착잡한 기분으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다가 숙소 앞까지 가지 않고 해안도로 시작 지점에서 내렸다. ‘어차피 저녁 요가도 못 하는데 산책이라도 해야지’ 싶어서였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다. 버스 타면 금방이라 1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것을 모르고 내렸지만 그래도 괜찮다.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어온다. 7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채 적당히 어스름이 깔려 있고,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씩 좋아진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는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넘어가면서 숙소를 어디로 잡을까 고민하다가 요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 보고 전일 급하게 잡은 곳이다. 공항에서 가깝고 요가를 할 수 있으니 별생각 없이 잡았는데 숙소 위치가 무지개 해안도로 바로 앞이다. 숙소에서 나오면 알록달록 무지개 해안도로가 반짝이고, 그 위에서 각종 포즈로 인증샷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변 가게들도 밤늦게까지 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이른 아침에도 위험하지 않다. 덕분에 오늘 새벽에 혼자 해안도로 러닝을 하고, 해안도로 중간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오션뷰를 즐기며 아침으로는 좀 과하긴 하지만 제주에서만 파는 비자림콜드브루라떼와 우도 땅콩 생크림롤을 먹었다. 새벽 7시인데도 러닝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이 많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번잡하지 않고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상쾌함만 남아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시 뛰어 돌아와 아침 요가 수업을 듣고 하루를 시작했다.
저녁 바다를 보며 해안도로를 걷다 보니 바다 위에 불을 밝히고 떠 있는 수 없이 많은 배들이 보인다. ‘이거구나...! 은기 말이 맞았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노희경 작가의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6살 은기에게 제주도 출신 아빠 만수가 제주에는 소원 100개를 달어주는 달 100개가 뜨는 곳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건 다 거짓이라고 하지만 은기는 아빠를 믿는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아빠 만수와 그 딸 은기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달 100개 있는 곳에 은기를 데려간다. 만수가 말한 달 100개는 지금 내가 보는 저 풍경처럼 밤바다에 뜬 배가 낚시를 위해 전등을 밝힌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드라마 속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달이 100개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마음이 저 파도처럼 울렁인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바다 위 달을 100개나 만나다니. 한치 철인 여름, 제주에는 밤마다 이렇게 한치잡이 배가 뜬다고 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해 지기 전에는 숙소에 돌아가니 버스를 계속 놓치고, 차가 많이 막히지 않았다면 8시부터 시작되는 한치잡이 배가 무수하게 떠 있는 이 아름다운 제주 밤바다의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내가 놓친 것도 있지만 또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다. 전에 읽었던 책 속 문장이 생각났다.
누구나 돌아보면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인생길이 그렇게 험난하게만 펼쳐지지 않는다. ‘왜! 내 꿈만 이루어지지 않느냐’며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잘 생각해보면 꾸지 않았던 꿈이 이루어진 게 있다. 꾸지 않았던 꿈이 이루어져 꾸어온 꿈 대신 행복했던 순간이 분명 있다.
<홍미숙, 「나에게 주는 선물」 중>
기분 좋게 바다를 보며 해안도로를 걷다가 또 다른 선물을 만났다. 나이트 시티투어 버스 탑승객을 대상으로 시티 투어 주최 측에서 준비한 버스킹이었다. 해안도로 중간 작은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어 나도 슬쩍 자리 잡고 노래를 같이 들었다. 수준급의 연주와 노래에 뒷 배경으로는 제주 밤바다가, 바다 위에는 수많은 배가 출렁이고, 배마다 각자 자신의 달을 밝히고 있다.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청춘 같은 초여름밤이다. 한강 버스킹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바다 앞 공원에서 노래와 기타 연주를 들으니 정말 여름밤의 꿈같았다. 잊지 못할 밤이 될 것이다. 혼잣말로 계속 ‘미쳤다, 미쳤어’를 외쳤다(혼자 다니면 혼잣말이 느는 것 같다). 그리고 내일 점심은 무조건 한치물회를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여행의 마무리로 완벽한 밤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새벽에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빛에 눈을 떴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암막커튼을 걷었는데 내 눈앞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5시 30분이었다. 그동안 일출을 보려고 일부러 알람을 맞추고 새벽에 일어나 창가에서 기웃거렸는데 우연히 기가 막힌 일출을 보게 된 것이다. (이쪽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면 전에 있었던 서귀포 숙소 창문 방향으로는 일출을 볼 수 없는 게 맞는 거구나, 나는 동서의 방향 개념도 없는 문과생이다. 물론 모든 문과생이 그런 것은 아니고 문과라는 핑계를 대고 있는 것뿐이다.) 일어나 사진을 찍고, 침대에 누운 채로 해가 뜨는 모습을 30분 정도 지켜보았다. 새벽에 받은 선물을 잊고 있었다.
실패를 했거나,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지금 이 기분을 떠올려봐야겠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른다.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갔던 사계항을 발견한 것, 버스가 없어서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대포항의 작은 카페, 그리고 오늘은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우연히 내게 온 좋은 것들이다. 돌이켜보면 틀어진 계획도 많았지만 꾸지 않은, 이루어진 꿈도 많았다. 그리고 그 꿈도 소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