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도 혼자 잘 봅니다
제주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유리 벽돌이 빛의 각도에 따라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제주도에 다녀온 후 내내 복잡한 서울을 떠나 제주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는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전시를 보고 ‘아, 이게 서울 사는 맛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전시를 공짜로 봐도 되나. 언제든 밖에 나 오기만 하면 얼마든 이런 훌륭한 전시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서울살이의 큰 장점 중 하나다.
평일에 시간이 많으면 평소 웨이팅이 길어 가지 못했던 맛집에 가거나, 여행을 많이 다닌다거나 할 줄 알았지만 실상은 현생에 치여 그렇지 못하다. 주로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서 채용정보를 보거나 자소서를 쓴다. 집 앞 스터디 카페에 가서 인강을 듣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10여 년 만에 가기 시작한 구립 도서관도 내 단골 장소다.
특히 구립도서관은 조용하고 쾌적하고 무료고, 몇 시간이든 이용할 수 있어 좋다. 게다가 자소서 쓰다가 다 때려치우고 싶어질 때면 한 층 아래 열람실로 내려가 시사 잡지도 마음껏 보고, 책도 골라 볼 수 있다. 노트북 열람실이 따로 있어 충전도 문제없고, 22시까지 운영하므로 시간도 넉넉하다. 22시에 도서관 운영 종료 시간에 맞춰 우르르 나서는 사람들 틈에 있자면 하루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서는 길 같다. 구립도서관이 모교 근처라 학창 시절 생각이 많이 난다. 그때의 나는 내 나이면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한 밤거리를 걸어 귀가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집에 가서 씻고, 다음날 일어나 운동 갔다가 또 카페나, 스터디 카페나, 도서관에 가는 것이 내 최근 일상이다.
오늘은 전 직장 상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6개월 간 전 직장 근처도 가지 않았다. 덕수궁에 꽃이 필 때쯤 놀러 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다. 회사를 다닐 때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가는 길, 산책하는 길에 회사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덕분에 누구와 점심을 먹었는지 서로 알게 되고, 의외의 인물과 식사를 한 날에는 “그 사람 누구냐”, “왜 같이 먹었냐” “뭐 먹었길래 그 근처에 있었냐” 묻거나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내가 누구랑 밥을 먹었는지 소문이 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까지 회사 사람들이 오지 않겠지 생각하며 멀리 나가 혼자 밥을 먹는 날도 꼭 누군가를 만나 들키곤 했다.
이 근방에 오면 회사 사람을 만날 확률이 너무 높고, 만나면 근황을 물을게 뻔하고, 나는 아직 취업하지 못했다는 말을 해야 하고, 그 말은 그대로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수순이 너무나 당연했다. 전 회사 직원들의 점심시간 활동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서대문, 광화문, 시청 근처는 6개월 간 쳐다보지도 않았다. 퇴사 후에도 계속 연락하고 있는, 앞으로도 연락하고 싶은 친한 상사의 연락에 용기 내어 온 것이다.
점심시간이면 자주 산책하곤 했던 돌담길 근처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최대한 구석 자리에 앉고, 한 식당에서 식사와 차를 모두 해결한 후 점심시간이 끝난 시간에 일어선다.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의지다. 차마 회사 앞까지 배웅은 못 하고 중간까지 바래다준 뒤 헤어졌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오니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누가 봐도 직장인인 사람들이 많이 보여 자극을 받았다. 나도 이제 운동복은 그만 입고, 맨날 혼자 컴퓨터만 하는 것 말고 어른의 착장을 하고, 사람들 속에서 소통하고 싶다.
식사하면서 추천받았던 시립미술관의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광화문으로 출퇴근을 할 때는 퇴근 후 문화활동을 많이 했다. 주변에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덕수궁, 돌담길, 조금 더 가면 국립고궁박물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민미술관까지 전시는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유연근무를 하고 오후 4시나 5시에 퇴근해서 박물관에 가 전시를 보면, 조용해서 집중하기도 좋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간 장-미셸 전이 기대 이상으로 좋아 퇴근 후 전시를 보러 다니던 때 기억이 났다. 같은 서울에 있었지만 그동안 방에만, 우리 동네 속에만 있었던 것 같다. 옷도 매일 땀 흡수와 열 배출이 잘 되는 재질로 만든 운동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진짜 서울 같은 도심에 나오니 서울 구경 나온 시골쥐 같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미술관에서 느꼈다.
장-미셸의 작품을 실내 미술관에서뿐만 아니라 덕수궁에서 야외 전시도 한다는 말에 덕수궁으로 향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덕수궁에 잠깐 들렀다가 그동안 계속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가봤던 <딜쿠샤>에 가기로 했다. 덕수궁 앞에 늘 줄 서 있는 와플집에 오늘도 줄이 길다. 와플 냄새에 나도 모르게 하나 먹을까 하고 메뉴판을 봤는데 대표 메뉴가 6800원이 됐다. 와플은 접고 전시는 체력이니까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서 라떼를 먹을까 하고 주문하기 위해 핸드폰을 켰는데 라떼가 7천 원이 됐다. 회사 다닐 땐 사원증을 제시하면 10퍼센트 할인됐는데 이제 할인도 없어 서럽다. 카페인의 힘 말고 정신력으로 전시를 보기로 하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교과서에서 보던, 하룻밤 사이에 물가가 몇 배씩 뛴다는 이야기의 현실판이다. 애덤스미스와 그레고리 맨큐가 “아 내가 책에서 한 말이 이거야~” 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리얼함이다. 물가상승을 이렇게 몸으로 체득하는 것은 처음이다. 어릴 적 좋아하던 EBS의 <신기한 스쿨버스>처럼 <맨큐의 경제학> 속에 빨려 들어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덕수궁에 가려고 했던 것을 깜빡 잊고 딜쿠샤로 가는 버스를 타버렸다.
딜쿠샤에 가는 길에 우연히 아쇼카 스페이스 갤러리의 <약함이 힘이 될 때> 전시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약점이 힘이 된다니 너무 멋진 말이다. ‘약함’을 ‘강함’으로 만든 12명의 혁신가 이야기다. 약점을 강점으로 만든다는 것은 거짓으로 단점을 장점화하여 자소서에 쓰던 말인데 이 전시에서는 그것이 생생하게 실재했다. 거짓으로 점철된 자소설만 썼으니 떨어진 건가. 자소서에서 나아가 내 삶에서, 이 세상에서 강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딜쿠샤로 향했다.
딜쿠샤는 예전에 재보수 기간에 와보고는 정식 개관 후에는 처음이다. 전문해설가 해설을 예약하고 왔으면 좋았겠지만 드디어 방문해봤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내부는 깔끔하게 잘 복원되어 있었다. 생활용품이나 인테리어를 고증을 통해 복원해 놓은 아름다운 공간이라 머물기만 해도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고지대에 위치해 서울이 한눈에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높은 건물이 많아 그때의 전망은 볼 수 없었다. 집주인인 메리 테일러의 자서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를 몇 년 전에 읽었는데, 한국에 대한 애정과 사랑,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곧은 심지가 느껴졌다. 특히, 독립선언서를 몰래 미국으로 보내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긴장되고 감동적이다.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선민사상이나 서구 우월주의 시선도 느꼈다. 당시 조선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그림까지 남겨주어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기록이 되었지만 묘사 과정에 녹아있는 시각이 때때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테일러 부부가 한국에 온 것은 미국이 광산채굴권을 획득한 후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 이는 부당한 이권 침탈이고, 제국주의적 동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딜쿠샤와 이 안에 생활품, 책에서 묘사된 생활만 보아도 무척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점이 당시 조선이 외세에 침략에 얼마나 취약했는지,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강탈하여 부를 축적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통신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부당함을 알렸고, 강제 추방 후에도 한국을 그리워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딜쿠샤에서 나와 도보 20분 거리의 서울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현재 진행 중인 2개의 전시를 보기 위해서다. 언제 가도 전시의 수준이 무척 높고, 공간도 쾌적해서 좋아하는 곳이다. 현재 기획전시는 <나의 하루 이야기-헝가리에서 온 사진>과 <명품도시 한양 보물백선>이다. "명품도시 한양"이라는 말이 유독 와닿는 하루다.
이 날 18,164 걸음을 걷긴 했지만 시간을 내고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만에 이렇게 4군데에서 수준 높은 전시를 볼 수 있다. 예술작품부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칠 가치관에 대한 것까지 주제도 다양하다. 취직을 하고 서울을 떠난 친구가 주말에 서울에 와서 전시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최근 복잡한 서울에 지쳐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서울에 살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동안에는 이 명품도시 한양을 사랑하고, 마음껏 즐겨야겠다. <해야씨의 일일>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오후 내내 혼자 방랑한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