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에 대한 환상과 현실
치앙마이에 대해 너무 몰랐다. 사실 난 치앙마이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맑은 공기와 산에 둘러 싸인 작은 도시, 저렴한 물가, 유유자적하고 한가한 도시를 상상하고 왔다. 그런데 며칠 겪으면서 보니 어떤 곳은 부천, 어떤 곳은 경기도 양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사실 가족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았을 때 치앙마이가 너무 좋아서 남은 건 아니었다. 그냥 서울 가도 딱히 할 일 없는데 이런 기회가 언제 올까 아까워서 남을 결심을 한 것이다. 돌아가면 또 그리워질지 모르지만 아직도 치앙마이가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너무 좋고 행복했다가 화딱지가 났다가 오락가락했다. 혼자 10일 정도 더 지내고 결국엔 치앙마이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아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도보가 그 도보가 아니다
우선, 도로 상황이 너무 안 좋다.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지지 않아 길이 좋지 않다. 구글 지도로 보니 목적지가 도보로 13분, '갈 만 한데?'라고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나라에서 도보 13분과 큰 차이가 있다. 구글에서 안내하는 길은 인도가 없는 곳도 많다. 내 옆으로 차와 오토바이가 쌩쌩 달리는데 그 길을 그냥 걷는 거다. 신기하게 차가 알아서 피해 간다. 신호등도 없는 곳이 많아 양 옆을 보고 눈치 보다가 몸을 던져 건너야 한다. 게다가 해가 졌을 경우는 더 심하다. 방금 전까진 큰 빌딩이 있고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거리였다가 한 골목만 들어가면 깜깜하고 포장이 잘 되지 않아 울퉁불퉁 위험한 길이 나온다. 이런 곳에 가게가 있다고? 의심하면서 걷다 보면 가게가 나오긴 하는데 그 긴장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미세먼지와 매연
매연도 무척 심하다. 공기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찾아보니 치앙마이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매쾌한 매연 때문에 KF94 마스크를 꽉 끼고 걷는다. 좋지 않은 도로 상황과 매연 때문에 10분 이상 걸으면 피로도가 장난 아니다. 게다가 구글맵은 골목길을 안내하기도 하는데 종이 한 장 차이로 번화가였다가 엄청 무서운 골목길이었다가를 반복한다. 높은 확률로 그 길에는 줄을 하지 않은 큰 개들이 있다. 물지는 앉는데 짖는다. 나를 쳐다보면서 계속 짖는다. 도보 이동을 고려할 때 평지가 대부분이고 도로가 잘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도로를 생각하면 안 된다. 어지간하면 차를 타자. 타안에서는 걸을 만 한데 밖을 넘어가 큰 길가로 가면 정말 정말 힘들다.
대중교통의 부재
그러나 차를 타기도 쉽지 않다. 대중교통과 비슷한 개념인 썽태우를 타려면 흥정해야 하는 피곤함이 있고, 목적지를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랩은 부른다고 바로 오지 않는다. 차가 없어 아예 콜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기사가 터무니없이 가격을 올려 흥정을 할 때도 있고, 차를 잡았다 해도 멀리서 오는 차를 10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많다. 특히 내가 간 시기는 극성수기인 크리스마스를 낀 연말과 연초였기에 더 그랬다. 연휴 기간이라 쉬는 라이더들이 많은데 관광객은 많으니 수요와 공급 균형이 잘 맞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차를 잡는 과정 자체가 피로하다. 나는 8시에 나갈 준비를 마쳤는데 그랩, 인드라이브, 볼트 앱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차 잡기를 마치고 탑승을 할 때는 이미 8시 30분이 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먼저 잡아두려고 했다가 밥 먹다 말고 나간 적도 있다. 취소해도 됐지만 외곽이고 저녁이라 너무 어렵게 잡은 차였기에 또 언제 차가 잡힐지 모르고 기사님께 미안해 그냥 탔다.
관광하기 딱 좋은 날씨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상쇄할만한 매력도 있다. 12월 말의 치앙마이 날씨는 환상이다. 같은 시기에 방콕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땐 정말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때 썼던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들고 왔는데 여기선 그런 걸 쓸 분위기가 아니라 한 번도 쓰지 못했다. 북쪽 고지대라 기온이 낮아 더위가 한 풀 꺾인 늦여름이나 선선한 초가을 날씨 정도다. 20분 이상 걸으면 몸에 열이 살짝 오른다 싶은 정도. 초록 초록한 정원이 잘 갖춰진 야외 테이블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어도 춥지도 덥지도 않고 딱 좋다. 자연을 느끼기 딱 좋다. 카페, 음식점, 숙박업체 어디나 대부분 개방형 구조이고 야외 테이블을 갖고 있다. 영업을 하는 카페나 호텔은 물론, 가정집에서도 다 정원을 잘 가꾸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또한, 많은 호텔과 숙박업소가 수영장과 야외 정원이 있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자연과 어우러진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면 어디서나 새소리와 풍경소리가 들린다. 힐링도 이런 힐링이 없다. 그 소리를 뚫고 끊임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굉음과 매연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부자가 된 것 같은 착각
저렴한 물가의 매력도 크다. 아무리 핫한 카페에 가도 음식점에 가도 가격을 미리 알아보지 않고 들어가도 된다. 아래 사진에 옥수수 쏨땀과 숯불구이 두 접시를 혼자 먹고 낸 돈은 155바트, 우리 돈 6000원 정도다. 심지어 많이 나온 편이고, 로컬 식당에서 메뉴를 한두 개 시키고 음료까지 시켜도 100바트, 우리 돈 4000원을 넘지 않는다. 저렴한 로컬 식당에 가면 50~70바트 음식도 많다. 입맛에도 잘 맞는다. 맛있어서 한 입 먹을 때마다 혼자 감탄했다. 경제적인 부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아주 큰 플러스 요소다. 카페에 갈 때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분위기만 보고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자기만의 특색을 가진 카페 천국
우리나라 카페 메뉴는 커피 위주인 곳이 많아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내가 카페에서 먹을 수 있는 음료가 많지 않다. 그런데 치앙마이 대부분의 카페는 무조건 타이밀크티와 타이레몬티를 판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생과일이라고 적지 않는 과일 스무디와 100퍼센트 착즙 주스와 역시 대부분 판매한다. 분위기만 보고 들어가 가격표도 보지 않고 "원 아이스 타이밀크티 플리즈"를 외치면 티백을 우려낸 밀크티에 우유 거품을 가득 올려준다. 가격은 대부분 40~70바트(1600원에서 2100원 사이)다.
무엇보다 치앙마이에서는 1일 1 카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카페가 많다. 카페가 많기만 한 게 아니라 커피 생산지라 그런지 커피 퀄리티도 높다. 직접 커피 원두를 생산하는 분이 운영하는 가게도 있다. 커피를 만드는 방법도 다양하다. 기계 압축이 아니라 핸드프레싱을 하는 가게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드립커피, 핸드프레싱 등 커피 추출 과정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이 도시는 무슨 예술가 마을인가. 카페가 다 예쁘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많지 않고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인데 개개인의 특성을 가득 담아 잘 꾸며놓아 그 카페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즐기고, 나와 맞는 찾아다니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길 가다 우연히 골목 끝에서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아 한 두 시간 쉬어 갈 때의 행복감이란 말로 다 하기 힘들다.
그러나..
좋게 말한다면 삶의 여유
가격에 감탄하지만 속도 때문에 화가 솟아오를 때도 많다. 분명 직원이 많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작은 가게로, 당장 앞에 보이는 직원만 어림잡아 5명 이상은 되는 손님도 직원도 많다. 빈 테이블도 많은데 뭔가 회전이 안 된다. 주문을 하는데 10분, 이후 음식을 받으려면 30분이 걸린다. 빨리빨리의 민족으로서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일어나서 테이블을 촥촥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9시에 오픈인 가게에 8시 40분부터 가서 줄 서 있었는데 손님들 줄도 안 세우고, 9시가 되어서야 세월아 네월아 문을 열고 가게 앞에 간판을 세팅한다. 9시 10분이 되어서 가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가 주문 순서도 얽힌다. 아무리 손님이 기다려도 자신만의 페이스로 천천히 진행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고 부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성질이 나기도 한다.
온화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들이 온화하고 여유롭다. 내가 QR코드를 이용해 결제를 할 때 앱 구동이 늦어도 여유롭게 기다려준다. 은근 정도 많아 외국인 관광객을 잘 챙겨주기도 한다. 혼자가 된 후 올드타운 농부악공원에서 아침에 열리는 요가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여행자들을 위해 공원 입구에서 나무껍질을 엮어 만든 것 같은 요가매트를 15바트(550원)에 대여해 준다. 매트를 들고 자리가 없어 앞으로 가지 못하고 뒤에서 쭈뼛거리면 태국 어머님이 보시고는 앞에 자리를 이리저리 만들어 이리로 오라고 손짓해 앞에 앉혀주신다. 어제는 수업이 끝난 후 모두 가지 말고 앉으라고 하시더니 몇 분이 모아서 샀다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태국 전통 간식을 나눠주었다. 시장에서 보기만 하고 무슨 맛인지 몰라 사 먹지 못했던 과자인데 우리나라의 쌀로별 맛이 났다. 바삭하고 달콤하니 맛있었다.
한 쇼핑몰에서 무료로 하는 요가 수업을 받으려고 갔는데 실제 수업 시간과 홈페이지에 게시된 시간이 달랐다. 헤매다가 쇼핑몰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안타까워하면서 수업 시간표를 찍으라고 하고, 잘 찍었는지 확인도 했다. 다음에 오면 어디서 듣는지도 알려주고, 큼직한 오렌지를 두 개 주면서 비타민이 많다고 먹으라고 했다.
마지막 이틀을 묵었던 호텔 주인 부부는 내가 저녁에 배달음식을 주문하자 같이 호텔 밖에 나가서 라이더를 기다려주고 대신 받아주기도 했다. 음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그릇과 식기를 빌려주고는 씻지 말고 그냥 방에 두고 가라고 챙겨주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땐 마음이 따뜻해진다. 대부분의 상인과 드라이버가 잘 웃고 친절하고 느긋했다. 장사할 생각이 없는 건가 싶게 여유롭다. 뭔지 몰라 살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면 먹어보라고 한 입 건네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나가도 여유롭게 웃으면서 코쿤카아 하고 인사해 준다.
초면인데도 흥 많고 농담도 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카페에서 쿠키를 주문하면서 이건 3개, 이건 2개, 이건 1개라고 주문했더니 three, two, one, go~ yeah 하면서 농담을 한다거나, 차분한 분위기인 우리나라 요가 선생님들과 달리 치앙마이에서 만난 두 분의 요가 선생님이 모두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쳤던 것, 요가 수업에서 만난, 장난을 잘 치고 춤도 잘 추시던 현지인 아주머니까지. 몇 마디 나누면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뿜는 사람들로 인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북부지역의 특색이 담긴 음식
북부 지역의 특색이 담긴 요리도 매력적이다. 카오쏘이와 옥수수쏨담, 피시누들, 숯불구이, 어묵국수, 치킨라이스 등을 파는 가게가 많다. 우리 입맛에도 잘 맞고 가격도 저렴하다. 큼직한 닭다리가 두 개나 들어간 미슐랭 국수가 1500원이라니. 에어컨이 없어도, 내 옆으로 차가 씽씽 달려도 이해할만하다. 참고로 에어컨이 있는 가게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12월에 방문해서 그런지 에어컨이 없어 딱히 덥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래서 치앙마이의 매력은
요약하자면 아직도 정말 이 도시는 뭘까 싶다. 오토바이가 진짜 정말 아주 많고 매연이 심한데 눈만 돌리면 예쁜 나무와 꽃이 있고 하늘이 맑다. 길을 가다 보면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예술가인가 싶게 정원도 잘 꾸며놓았고 여기저기 예쁜 가게가 너무 많다. 어디에나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각자 특색을 가진 사원이 있다. 맛집은 웨이팅이 너무 심하고 회전율이 느려서 화가 나는데 또 싸고 맛있어서 용서가 된다. 대중교통이 없어 스트레스받는데 택시를 타고 인당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대중교통 정도 비용이 나온다. 모바일 결제가 오래 걸려도 다들 웃으면서 느긋하게 기다려준다. 로딩 창이 무한 반복되는 핸드폰 화면을 가리키면서 "쏘리. 쏘 슬로우,," 하고 조급 해하는 건 나뿐이다.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하다가 가도 나의 코쿤카 인사에 카아(남자는 캅)~ 하고 대답해 주는 상냥함이 좋다. 망고 스무디를 시키면 그 자리에서 큼직한 망고 하나를 슥슥 잘라서 넣고, 심지어 갈비(망고 씨에 붙은 부분)는 쓰지도 않는다. 그걸 통째로 넣어 간 다음에 컵에 가득 붓고 돔뚜껑을 닫고 뚜껑 위까지 가득 부어 주는 스무디가 1500원이다. 이러니 싫어할 수가 없다. 이상한 매력을 가진 도시다.
치앙마이 후기를 보면 길이 안 좋아 아이 데리고 다니기 민망하다, 매연과 미세먼지가 심하고 상수도 오염이 심해 한국에서 가져온 필터도 소용없다, 길에서 쥐를 봤다 등 실망했다는 글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치앙마이 여행을 다녀온 뒤 치앙마이 앓이를 하고 있다는 사람들도 많다. 몇 번씩 한달살이를 다시 하러 오는 사람들도.
나의 경우 치앙마이에 대한 출처 모를 환상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힘들었다. 조용히 쉬면서 힐링하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스트레스가 컸다. (특히 처음 일주일간 묵은 숙소는 모두 올드타운 바깥쪽에 있어 큰길을 지나야 올드타운으로 들어갈 수었고, 유흥가거나 외지고 어두운 길이 많아 더 그랬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자 어느새 익숙해지고 이 도시가 정겹고 사랑스러워졌다. 치앙마이 사람들의 예술성과 저 느긋함의 힘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리울 것이다. 치앙마이 앓이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