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맺어질 인연이었던가…
제주도의 습한 여름과 이별하고
무더운 여름의 땡볕과 습기 가득 먹은 도시의 공기 냄새를 뒤로한 채 인천공항을 떠나 독일이란 나라에 첫 발을 디디던 그날이 기억난다. Herzlich Willkommen 이란 환영인사와 함께 무언가 칙칙하고 딱딱한 느낌의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의 덤덤한 공기. 2024년 8월 23일 나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그렇게 독일의 땅을 밟았다.
과거 고등학교 시절에 엄하신 어느 독일어 선생님의 무자비한 수도 호수 매질을 피하고자 두려움에 열심히 공부했던 독일어…“Ich liebe dich so wie du mich… 사랑해선 안될 게 너무 많아.. ” 당시 유명했던 가수 신승훈의 엔트로 노래말이었던 베토벤의 가곡… 독일어는 그렇게 젊은 나에 대한 추억으로 남을 그저 그런 옛이야기 속의 한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이별한 독일어였지만 그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흘러 대학 과정을 마치고 스물여덟에 얻게 된 첫 직장. 독일계 외국인회사 지멘스…Siemens. 하지만 독일행을 기대했던 루키 신입사원 나부랭이에겐 그런 과분한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는 영원토록 상관없을 것만 같았던 독일이란 나라가 다시금 나에게 기회의 땅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게 언제였을까?
성악 만학도가 독일어를 배우기까지
2018년 가을학기 40대 초중반이던 나는 제주대학교 음악학과 일반대학원에 합격하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클래식이라 불리는 고상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 즉 성악가들은 기본적으로 선율에 인간의 언어를 입혀서 노래하는 자들이기에 가사를 표현하는 발음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와 멜로디를 가진 성악가라 해도 선율을 통해 명확한 가사를 청자들에게 의미 있는 시구로써 정확히 전달될 수 없다면 그 음악은 아마도 귀를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새소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서 다시 덕일어를 배우게 되었다. 아니 독일어를 읽는 법을 배웠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오스트리아 유학파셨던 교수님의 지도로 난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손을 놓았던 독일어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게 되었고 수많은 독일 가곡을 부르기 위해 열심히 독일어를 토해 내었다. 그렇게 흐른 2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졸업 후 찾아주는 이 없어질 때 즈음에 이제는 더 이상 독일어 가곡이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게 될 무렵… 잊혀가던 또 누군가가 독일이란 테마를 손에 쥐고 나의 삶을 박차고 들어왔다.
김사장~~ 독일은 어때?
2023년 가을이었나 보다. 가게 밖에 낯익은 오래된 코란도 지프차가 주차되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게로 들어서던 지인을 마주하던 날. 처음 만나던 날도 그랬지. 하루하루 블로그에 나의 제주정착기를 써 내려가던 어느 날. 그날에도 같은 차와 같은 표정으로 우리 가게를 들어섰었지. 그 함박웃음과 함께… 우리 가족은 나름의 인생관을 가지고 섬나라에 내려와 이곳 제주도에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맘을 먹었더랬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남은 자본을 탈탈 털어 작은 치킨집을 시골 외곽에 오픈하고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가고자 할 즈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지인분은 나의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나의 삶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계셨던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의 제주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변곡점의 시점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을 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높은 가능성을 가질까? 아마도 이 글도 언젠가는 그분께 발각(?)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인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와는 삶에 대한 철학 즉 세계관의 결이 다른, 그렇지만 나의 잠들어있는 욕망을 건드려서 불을 지필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동차 빌딩숲을 벗어나 자연과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삶을 모티브로 삼고 살고자 했던 나에게 자본의 위대함과 경제적 자유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어필하며 나의 삶을 초라한 초가집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분. 하지만 뭐 따지고 보면 관점의 차이였을 뿐 악의는 없었던 자본주의의 최 선봉에 서있었던 나와 같은 외지인이었던 그분이… 나의 가게에 방문하던 그날.
“김사장… 왜 아이들을 미국, 캐나다, 호주로만 보내려고 생각해..? 유럽이란 곳 생각해 봤어? 독일 어때? 독일어만 잘하면 인근 국가에 자유롭게 근무할 수 있고 또 독일은… 선진국이잖아. 복지 정말 좋지… 우리 가족도 지금 뒤셀에 가 있잖아~~“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그 분과 나의 경제적 격차를 여실히 보여주는 그분의 일방적인 자랑으로 끝이 났지만 그가 떠나고 나는 다시금 자본주의의 끝자락에 매달리는 것이 맞나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제주도에서 시골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두 딸들의 미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 보니 섬나라를 벗어나 육지의 대학으로 가는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결국 고립된 섬나라에서 자라 외지인으로서 토박이 도민들과 한정된 밥그릇 다툼을 해야 하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는 있겠지만…그 용도 개천물을 먹고 자랐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금명이를 배출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시작된 막연한 나라 독일에 대한 검색은 나와 아내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고 독일에서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제주에서의 불확실성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이 될 가능성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 가족은 한 자리에 모여 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역시나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어른인 우리도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아이들이 느낄 불안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흙수저인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산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능하다면 우리 아이들이 다양한 해외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겪을 수 없는 삶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일 것이라고 늘 말해오던 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이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기회이고 우리 가족의 미래를 결정지을지도 모를 중차대한 시점일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도 없는 독일행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우리는 낯선 독일어 공부를 시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유럽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 독일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