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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파인더 Aug 28. 2021

'0'과 '1'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이진법으로 바라본 세상

이진법(二進法, binary)은 두 개의 숫자(1과 0)만을 이용하는 수 체계이다. 관습적으로 0과 1의 기호를 쓰며 이들로 이루어진 수를 이진수라고 한다. 이진법은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가 음양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명하였다. 십진법의 1은 이진법에서는 1, 십진법의 2는 이진법에서는 10, 십진법의 3은 이진법에서는 11이다. -위키백과

십진수의 세상

‘0’의 개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원전부터 '무(無)의 개념이 등장한 듯한다.) 아마도 인류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있다’와 ‘없다’로 양분할 수 있는 인지 체계가 생겨난 순간부터일 것이다. 숫자에 대한 개념은 태어나 눈이 열리고 손과 발을 느끼는 유아기의 경험을 시작으로 물건이나 돈을 주고받기 위한 목적으로 셈하기 위해 손가락을 펼쳐서 바라보았을 때이지 않을까?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숫자의 크기는 아마도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의 까닥거림 정도로 헤아릴 수 있는 수의 정도였을 것이다. 손가락이 12개였다면 우리는 아마도 12진법의 수체계를 가진 문명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유추를 통해 십진법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수를 헤아리는 행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펴서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는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진수에 대한 단상

이진수. 0과 1로만 구성이 되어 있는 수. 이 글에서 뜬금없이 이진법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이 세상, 즉 우리가 자연계라고 인지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이 만들어진 구조가 마치 이진법의 0과 1의 개념처럼 이분법이 적용된 것 같다는 것이다. 마흔이 넘어 갑자기 발동한 이진수에 대한 호기심과 이진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만물이 0과 1로 구성되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중년의 심장은 길을 걷다 우연히 좋아하는 이성을 만난 초등학생의 가슴처럼 설레는 것이다. 0은 시작이고 알파이며 1은 끝이자 오메가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논리의 법칙을 수의 이론으로 연결시키게 되면 0과 1만으로 구성된 숫자인 이진수가 수줍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간단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또는 내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십진수를 이진수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십진수가 9를 기점으로 자릿수를 바꾸어 더 높은 수로 올라가는 것과 똑같은 논리로 이진수는 1을 고비로 자릿수란 언덕을 넘어가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십진수 1을 이진수로 바꿀 때 1은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0이 아닌 1이란 이진수로 표시하게 된다. 십진수 1은 이진수 1과 같다. 십진수의 0과 1은 두 가지 정보를 담을 수 있고 이진수의 0과 1도 두 가지 정보를 담을 수 있게 된다.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그렇다면 십진수 2는 이진수로 어떻게 표현될까? 이진수의 자릿수 원리에서 2는 1이라는 기점을 넘어서는 수이며 1과 1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 이진수 1과 이진수 1을 더해지게 되면 첫 번째 자릿수는 언덕을 넘어야 하기에 아무것도 없는 0이 되고 더해진 이진수 1은 두 번째 자릿수로 올라타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십진수 2는 이진수로 표현하게 되면 10 이 된다. 십진수 2는 0과 1 그리고 2를 지니고 있어서 우리는 세 가지 정보를 각 수에 담아낼 수 있고 같은 이치로 이진수 10도 역시 0과 1 그리고 10이라는 세 가지의 다른 정보를 담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십진수 3은? 단순하게 십진수 3은 2와 1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기에 앞 서 알아본 이진수는 1과 10이다. 이진수 1과 이진수 10을 더하면 11의 결과를 얻게 되며 십진수 3은 이진수 11이 된다. 이진수 11은 0, 1, 10, 11로 구성되며 네 가지의 정보를 담을 수 있게 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힘을 내어 십진수 4로 넘어가 보자. 십진수 4는 십진수 2와 십진수 2의 조합이며 십진수 2는 이진수 10 임을 우리는 앞선 경험을 통해 안다. 이진수 10과 이진수 10의 합은 결국 다음 자리로 올라가야 한다. 두 번째 자리의 합이 1보다 크니까… 결국 십진수 4는 이진수 100이 된다.  그럼 십진수 5는? 십진수 4 더하기 십진수 1이기 때문에 이진수 100 더하기 이진수 1이 된다. 결국 십진수 5는 이진수 101이 된다.


이진수의 규칙 -패턴

계속해서 십진수를 이진수로 치환하는 노동을 해 나가다 보면 나타나는 이진수 속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십진수를 2의 배수로 이루어진 수로 변환할 수 있으며 2의 지수승에 1을 더한 숫자가 이진수의 자릿수를 나타내게 됨을 알 수 있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난 머리가 나빠 좀 오래 걸린 듯하다) 예를 들어 십진수 9를 2의 배수의 조합으로 나타내면 8 + 1이며 8은 2의 3승이며 1은 2의 0승이다. 결과적으로 십진수 9는 4자리의 이진수로 표현될 것이며 4자리와 1자리를 제외한 자리 값은 ‘0’이 되기 때문에 십진수 9는 이진수 1001이 된다.


이진수로 치환한 세상

이젠 이진수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한 우리는 이진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 방법은 세상이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0과 1은 서로 상극이며 함께 양립할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이다. 음과 양, 흑과 백, 남과 여, 거짓과 진실, 낮과 밤, 너와 나, 천사와 악마, 해와 달, 시작과 끝 등등 양립할 수 없는 개념들은 이렇게 단순하게 이진법으로 표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상은 이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아니 너무 복잡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세상은 십진법의 셈으로는 헤아릴 수 조차 없다는데 핵심이 있다. 우리 인류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숫자인 십진수로 위에 열거된 자연의 현상을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았다. 가능했다. 0과 무한대를 통한 구분이라면, 다시 말해 0은 알파이고 시작이며 무한대는 끝이자 오메가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십진수는 흑과 백을 10가지로 쪼개 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삶을 복잡하게 접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복잡한 세상을 디지털화시키기

전등을 켠다. 그럼 우리는 1이라는 신호를 준다. 그럼 전등을 끈다면? 그렇다. 우리는 0이라는 입력을 준다. 0과 1이 주는 신호만으로 우리는 전등을 켜고 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전등을 너무 밝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 않게 켜고자 한다면 우리는 0과 1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0과 1 사이에 밝기의 정도를 넣어 쪼개어주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희미함의 정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0과 1 사이의 어느 지점에 우리의 방점을 찍어야 할까? 여기에서 단순과 복잡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켜짐과 꺼짐만 존재하던 전등에 4단계의 밝기 조절을 넣고 싶다고 가정하면 0과 1만을 가진 이진수 1에다가 밝기의 정도 4개를 더해주어야 하고 결국엔 6개의 정보를 표현하는 전등이 만들어져야 한다. 켜기, 끄기, 밝기 조절이 되는 전등의 세상은 십진수 6이 아니라 십진수 4와 2의 합이며 2의 2승과 2의 1승 즉 세 자리의 이진수 110이 된다. 처음에 지척이었던 거리가 결국 3배나 멀어졌다. 하지만 0과 1이라는 극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0’과 ‘1’ 사이의 거리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거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일 수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 사이의 거리일 수도 있다. (사실 밤하늘의 별은 하나하나가 태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0일 수도 있고 영원히 닿을 수 없는 1일 수도 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도 역시 그러하다. 복잡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 세상을 이진법의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엔 온엔 오프의 이진수들이 모여서 ‘0’과 ‘1’ 사이를 왕래하는 별 빛들의 조합일 뿐이라면? 다만 그 반짝거리는 오만함에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우리는 항상 그래 왔듯이 우리가 가진 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진법으로 바라본 복잡한 세상은 이제 조금은 명료하게 헤아릴 수 있는 통찰력이 누군가에게는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하루가 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정보의 소용돌이가 만들어 내는 환경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선택이 열 손가락에 의한 것이 아닌 0과 1이 만들어내는 복잡함이길 그리고 그 복잡함이 만들어내는 패턴(pattern)을 발견하는 길이길 희망한다. 그 패턴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0’과 ‘1’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면서 조금씩 더 행복해지길 희망한다.

 



그렇다면 지금 너와 나의 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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