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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파인더 Aug 10. 2021

설거지가 주는 통찰력

복잡한 문제 해결에서 한 발 물러서기

설거지는 조리기구, 접시, 칼 등을 씻어내는 과정을 말한다. 직접 손으로 하거나, 식기세척기를 이용하기도 한다. 부엌의 싱크대 또는 다용도 실에서 이루어진다. 문화에 따라 별도의 식기실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세척력을 높이기 위해 설거지할 때 세제를 사용한다. 세제에 포함된 계면활성제는 주부습진이나 접촉성 피부염을 유발하기도 하므로,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합성세제 외에도 EM 등을 이용해 만든 천연세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베이킹소다, 구연산, 과탄산소다를 설거지에 이용하기도 한다. '설거지'가 아닌 '설거지'가 옳은 표현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그 생각들이 지향하는 방향을 상실하여 여기저기 하릴없이 맴돌 때 나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주방으로 향한다. 내 머릿속의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싱크대에는 각양각색의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끈적이는 기름이 묻어있는 프라이팬부터 밥풀이 붙은 공기들과 수저들은 기본이고 물과 커피가 담겨 있는 컵들과 오늘 먹은 김치찌개를 위한 전투장이 되어 버린 도마가 있다.


 설거지의 시작은 우선 1L의 물의 준비이다. 물의 양은 계량이 필수이기에 주방 수도꼭지의 수압 체크가 필요할 것 같다. 라면을 끓이기 위한 계량의 목적으로 식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 비커를 준비하고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의 신호와 동조하여 주방의 수도꼭지를 개방한다. "쏴~." 그리고 '1초, 2초, 3초....'머릿속의 초시계가 가동되고 7초를 알리는 초침 소리에 비커의 1L를 알리는 눈금선에 물이 올라 찬다. 오늘의 수압도 지난 설거지 타임과 별 반 차이가 없다. 설거지 공정에서 고생한 비커는 당분간 담당업무를 졸업하게 될 듯하다.


 1L의 물이 설거지통에 부어지고 나면 주방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주방세제를 들어 정확히 한 번만 위에서 아래로 깊게 내리누른다. 끈적한 투명의 액체가 은은한 향기를 품으며 설거지통으로 똬리를 틀며 떨어지고 고무장갑을 낀 손은 물과 세제의 혼합물을 만들기 위해 5살 어린아이가 되어 마구마구 설거지통을 휘젓는다. 달걀흰자에는 머랭이 있다면 주방 설거지에는 세제 머랭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주방의 설거지에도 개량의 과학이 숨겨져 있고 그 원리를 따르면 많은 것을 아끼고 보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설거지에도 나름의 과정이 있다. 한정된 세제 머랭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최대의 세척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주방 싱크대 속에 꽉 들어 찬 주방도구들에게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임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방 통에 설거지거리를 담는 것이 아니다. 설거지통에서 세제 머랭을 수세미에 묻힌 후 그릇들을 주방 통 바깥에서 닦는 것이다. 즉 1L의 세제 머랭을 효율적으로 수세미에 분할하여 그릇들을 세척해야 한다. 또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첫째 기름기의 정도, 둘째 비린내의 정도, 셋째 소스의 정도이다. 그 세 가지의 가장 큰 기준을 중심으로 나는 마음속 찬장에 설거지 거리들을 나열하고 10분 간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처음에 들어 올리는 것은 싱크대 바닥에 헹굼 전에 올려둘 수 있고 기름기가 묻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스가 물로 씻겨질 수 있는 쟁반류이다. 이 쟁반류는 세제액을 가장 처음으로 만나게 되며 공간을 불필요하게 차지하는 다른 소소한 주방기구들을 헹굼 전에 안착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받침판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렇게 접시 1장과 수저를 포함한 컵 들은 고스란히 접시 위에 자리를 잡게 된다.


 두 번째로 집중해야 할 것들은 밥과 국을 담은 그릇들이다. 한국의 주방의 특성상 밥그릇과 국그릇은 밥풀과 양념이 붙어 있을 뿐 기름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직 하얀 거품을 자랑하는 세제를 수세미에 가득 담아 그릇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닦아낸다. 여기 뭍은 밥풀은 다음 끼니에 사용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세 번째는 김치찌개를 끓였던 접시 차례다. 새하얀 거품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위기에 안타까움이 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오늘은 다행히 생선류의 음식은 없는 탓에 김치찌개가 만들어 낸 빨간색 소스와의 싸움이 스토리의 갈등구조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물로 애벌을 한 탓인지 오늘의 세제 거품의 색깔은 아름다운 분홍빛이다. 다소 만족스럽다. 큰 문제없이 한 번씩의 수세미 사용으로 말끔해진 알루미늄 냄비가 세제 거품과 함께 반짝인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설거지가 만드는 스토리의 가장 큰 갈등의 서막에 있다. 계란말이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프라이 팬과 돼지고기와 김치를 썰었던 도마는 설거지 대장정의 가장 큰 걸림돌로 떡하니 싱크대의 중앙을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나는 여유롭다. 한 차례의 세제 거품 물이 프라이팬으로 부어지고 수세미 대신 빨간 고무장갑의 오돌토돌한 표면이 1차 세척을 시작한다. 한 차례로 끝나지 않을 싸움임을 알기에 2차례 3차례의 투척으로 프라이팬의 표면은 느끼함을 잃고는 서서히 고무와 코팅 팬이 만들어내는 마찰음을 만들기 시작한다. 최종 작업을 위해 수세미는 여유롭게 프라이팬 표면을 스케이트 타듯이 콧노래에 맞추어 활보한다. 세제통 안을 들여다보니 총알은 아직 여유롭다. 두 번째 손가락으로 프라이팬의 원주의 끝과 끝을 이동하며 지름을 측정하니 만족스러운 고무 마찰음이 들려온다. 이제 눈에 들어오는 건 마지막 갈등인 도마가 되시겠다. 원래 피부가 하얬던 도마가 수줍은 듯 붉게 상기되어 있다. 여러 차례 세제물을 공략하고 표면을 수세미로 수 차례 닦아주었다. 4차에 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이 고조된 갈등구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해보다 주방의 달인인 와이프의 도움을 청한다. 때론 문제 해결을 혼자 할 필요가 없다. 함께 한다면 문제 해결은 물론 풍부한 경험이 더해질 수 있다.


 설거지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헹굼 하는 시간일 것이다. 설거지 원리에 대해서 문외한이던 시절 설거지 한 번 하는데 세제통을 10번 넘게 눌러서 세제를 짜고 수세미에 묻혔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헹구는 내내 많은 양의 물을 통해 세척하지만 그릇들의 표면은 왠지 모를 미끌함이 남아 있었다.


과유불급 -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


 너무 많은 세제를 사용하면 세제가 기름막과 같은 막이 그릇에 형성되어 다량의 물을 사용해야 세제가 씻겨갈 수 있게 된다. 과유불급이 설거지 철학에도 통용이 된다. 과거의 과오를 벗어던진 요즘은 헹굼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말끔히 씻긴 그릇, 수저들과 냄비 그리고 프라이팬이 가지런히 건조통에 자리를 잡고 나는 마지막 골칫거리 해결을 위해 주방 통에 도마를 올려둔다. 햇살을 받은 주방 창가에 새하얀 눈가루가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다. 베이킹파우더를 한 큰 술 떠서 도마 위에 짭짭 흩뿌린다. 싱크대 아래 문을 열어 3배 식초를 꺼내 든 나는 옅은 미소를 날리며 한 방울 한 방울 도마 위에 떨어뜨리고 두 가지 다른 재료가 만나서 만들어 내는 화학물은 기체가 되어 도마 위에 남아 있던 오늘의 갈등을 날려버릴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더 이상 일이 진행되지 않거나 문제가 풀리지 않는 상황에 봉착하면 가끔 주방으로 가곤 한다. 단순한 설거지이지만 설거지를 통해서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에 봉착함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문제 해결은 복잡한 문제 해결을 위한 자신감을 제공해주며 더 나아가 복잡해 보이는 문제를 단순화시킬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설거지를 통해서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나면 복잡하던 내 머리 속도 언제 그랬냐는 듯 더러운 것들은 비워져 있다. 그리고 선명한 문제들은 해결책과 함께 세렌디피티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일을 잘하려면 설거지를 잘해야 한다는 게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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