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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파인더 Aug 10. 2021

어느 베테랑의 고백

성악설을 믿는 자의 시각에서

'베테랑(veteran) - 전쟁이나 특수임무를 오랫동안 수행한 후 퇴역한 군인을 일컫는 말,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을 태워버릴 것처럼 무덥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뜨거운 태양은 하늘 아래 모든 것에 스며들었고 마스크 속까지 가득 채운 열기는 숨 쉬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내려진 오전 업무 브리핑 미팅 준비로 어젯밤 잠을 설친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나를 괴롭히는  여름 아침의 태양은 쉬지 않고 나를 내리누른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마에 총총히 맺힌 땀방울은 드디어 사무실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체념으로 변한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무실의 냉풍기가 뿜어내던 굉음이 만들어내던 무미건조한 차가운 바람은 오전 미팅의 무거운 분위기를 알리는 서막인 듯하다.


 미팅은 담당자별로 업무의 제목을 구두로 나열하면 센터장은 그 업무들을 메모장에 하나 둘 써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 바퀴가 돌아가자 직원별로 맡은 업무에 대해서 브리핑을 시작했고 내 차례를 알리 듯 마른침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나의 귀 속을  자극한다. 엔지니어 경력을 오래  가진 탓에 오랫동안 노트북을 포함한 IT기기를 자주 사용했고 종이에 써 내려가는 손글씨를 사랑하지만 화면으로 보이는 타이핑이 더  좋았고 화면에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디지타이저를 좋아했다. 나의 눈엔 어젯밤 업무들을 돌아보며 태블릿에 사각사각 써 내려갔던 나의 업무들이 들어왔고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센터장에게 지나온 나의 발자취들을 훑어나갔다. 5걸음마다 센터장의 기적소리에 의해 멈춰지는 나의 발자국은 40분이나 지속되었고 그 발걸음이 멈추었을 땐 난 이미 영혼마저 탈탈 털린 좀비가 되어있었다.



 조직의 활성화를 통한 목표 달성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팀원들의 역량을 통한 원활한 업무의 진행일 것이다. 그중 으뜸으로 조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좁은 시선을 가진 팀원들의 역량을 발견하고 그 힘을 이끌어 내는 매니저의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담당자가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지, 업무량이 많아 버거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필요한 경우 적재적소에 가용한 인력 혹은 자원의 배분을 통해서 조직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활기차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을 지원하는 원동력이 바로 매니저들의 역량이자 자질인  것이다. 그런 자질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조직에서는 결국 꿈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간다.



 언제부터인가 혼자 밥 먹는 것이 더 편안한 건 내 인생의 아이러니가 되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는 혼밥보다는 굶는 쪽을 택했지만 마흔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은 빈 속으로는 성과를 내기 힘든 중년의 신세라 어떻게든 몸에 에너지를 공급해야만 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9할을 혼밥을 견디지 못했던 내가 이렇게 혼밥을 선택하고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삶 속에 존재하고 있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곳 직장이란 곳에서 살아남는 것은 정글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더 잔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샘~ 우리 조용히 이야기 좀 해요." 팀의 중간 리더인 베테랑 연구원이 날 부른다. 인스턴트 커피를 뜨거운 물에 녹이고서 무더움에 대항하는 냉풍기가 뿜어내는 작은 회의실 한쪽 구석에 우리는 마주하고 앉았다. 이 지역 도시재생 사업의 초창기 때부터 연구원으로 근무를 한 분이고 이제 거의 베테랑이라 소리 들을 법한 분이 나의 앞자리에 앉아서 나를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며 한참을 망설인다.

 


 2월 1일이었다. 제주에서 얻은 세 번째 직장.  그것도 마흔다섯이란 나이로 얻은 공공근로였다.  비록 정규직이 아닌 1년 위촉계약직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의 일의 경력은 품질과 단가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이른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원가 절감을 통한 공학을 통해 나는 급여라는 보수를 제공받았지만 지금의 업무는 주민 만족의 효율적인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 즉 주어진 예산을 어떻게  하면 생산적으로 주민의 만족을 최대화 또는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집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게 벅차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이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흘렀고 매섭기만 하던 2월의 시린 바람은  뜨거운 태양 속에 까마득히 잊히는 8월의 중심으로 바뀌어 있다.

 중간 리더인 그 분과는  같은 업무를 해 본 적이 몇 번인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가슴은 너무 따뜻하신 분이고 주민들과의 공감 능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 역량은 다소 부족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짐을 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로 발생하는... 그런 부류의 동료로 나에게 인식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탓에 나도 다른 동료들처럼 함께 업무에 엮이기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겹치는 일만 없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옆 부서 누나 같은 사람.



 "저 이번 달까지만 일하려고요..." 오전에 관리자로부터 받은 무자비한 공격과 8월의 뜨거운 태양으로 녹초가 된 내 몸은 이제 소파 위로 녹아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 분도 나와 같이 계약기간이 종료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같은 조건의 연구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 업무를 포기하고 나갈 만큼 우리는 어리지도 않고 무모하지도 않음을 서로가 알고 있다. "나 더 아프기 싫어서 그만하려고요.."

 2월 입사 이후로 4명의 동료가 눈앞에서 이 조직을 떠나갔다. 어제까지 업무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동거 동락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 엄청난 경험을 여러 차례 겪은 나는 한 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주위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나의 천성은 그러한 아픔을 수 차례 겪으면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어색한 외부환경에 철저히 지배되고 말았으며 사무실 내에서는 더 이상 나의 웃음과 함께 자존감을 포기하며 행사하는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극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든 선생님 도와드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다음은 제 차례일까 봐요."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어찌 보면 나의 진심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월등히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가 가진 역량을 다 털어내어 받아가는 게 고작 종이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를 급여뿐이라면 이런 조직에서는 더 이상의 시너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만 같았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 집의 가장이고 또한 주민들의 인정과 공감을 받으면서 하루하루 쌓아갔던 베테랑의 아름다운 발자국은 조직이라는 거대한 자동차의 늙어버린 부품이 되어 이젠 교체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의 공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은 채 한 갖 소모품이 되어 빛도 잃은 채 그렇게 버려지는 쓸모없는 부품인 베테랑이 지금 내 눈앞에서 울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정부를 조직한 관료들은 국민들에게 나라 경영을 목적으로 세금이라는 것을 걷는다. 그 세금을 이용해서 국민이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것을  사회적인 서비스라고 부르며 나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사업비를 활용하여 노후로 인해 늙어버린 원도심을 새활용하기 위해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의 활성화 사업의 다리가 되어 지자체와 주민 간의 간극을 좁혀 나가기  위해 현장에서 노력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멀어져만 가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어찌 보면 내가 속한 조직 내부에서부터 일어나야만 할  것 같다. 조직의 구성원은 서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고 있으며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다독이며 유대하여 조직을 건강하게 가꾸어 나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우리 중 관리자라면 본인의 권한과 책임을 다시금 돌아보아야 하고 더 낮은 자세로 팀원들을 다독일 줄 알며 나아가 조직의 비전과 방향을 설정하여 조직원과 공유하는 것을 통해 살아 숨 쉴 수 있는 조직의 숨골을 열어줘야 한다. 만약 본인이 그 일에 걸맞지 않거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다면 더 이상 팀원 갈아치우기로 면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란 말이 있듯이 이러한 내부의 소용돌이는 주민이 보고 있고 지자체가 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팀원으로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어느 베테랑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고 있다. 내일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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