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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0. 코스타리카에서 마라톤 달리기

긴글주의, 풀코스 아님 주의, 하프코스조차 아님 주의

by 에스더

2024.12.01. (일)


12월이다! 핸드폰도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달을 맞이하고 싶었는지 밤 사이 업데이트를 했다. 그래서 4시 30분 맞춰놓은 알람이 울리지 않은 거지. 잠결에도 쎄함이 느껴져 눈을 번쩍 떴더니 정확히 다섯시였다. 다섯시면 어젯밤 눈 감기 전 머릿속에서 돌린 시뮬레이션의 에스더는 이미 출발했을 시간이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 무섭고 무기력해졌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있다. 마곡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다 보면 오늘은 꼭 팀장님에게 퇴사 면담을 요청해야지 하는 다짐과 동시에 코스타리카? 거기가 어딘데 내가 간다는 거지 절대 못할 것 같다 하는 마음이 든다.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피곤함 때문인건지 뭔지 갑자기 대회 참여하러 가는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간은 흐르니 우선 나갈 준비를 마친 후 생각하려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 바나나를 포함한 준비물들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앉아서 정말 갈지 말지 고민할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이미 다섯시 반이라 그럴 시간도 없이 우버를 불렀다. 그런데 택시비가 너무 비쌌다. 10분 거리인데 왜 2만원이나 받으시는데요! 그 값에도 차가 안 잡혔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마라톤 행사 때문에 가운데 주요 도로를 막아놓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대회 시작시간인 6시에서 5분 지난 시간에 도착한 지각생. 이때까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출발 지점이라고 했던 국립 스타디움은 생각보다 너무 컸다. 도대체 어디서 짐을 맡기고 어디서 출발하는 건지 알 수 없었고 무작정 물어보고 또 물어보며 여기로 뛰다 저기로 뛰다 하다 보니 그 사이 20분이 또 흘러버렸다.


그래도 어떻게 추울까봐 위에 입고 왔던 옷들과 짐도 모두 맡기고 출발을 하긴 했는데 내가 출발을 한 건지 만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응원 나온 사람들의 Para allá 빠라쟈! 빠라쟈! 하고 외쳐주는 소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 보니 출발 게이트가 나왔다. 아니 저 이미 출발한 거예요 아니면 여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이 가득해서 힘든지도 모르고 뛰었던 10킬로의 물음표와 느낌표를 기록!


(이번 행사 혹은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함)


1. 전날 행사장에 방문하여 직접 키트를 수령해야 했다. 대부분의 코스타리카 주소들이 그렇듯, 우리 집 주소도 근처 큰 마트로부터 동/서쪽 n미터 무슨 색 몇 층짜리 건물. 이런 식인데 마라톤을 접수하면서 그래 이번 기회에 정말 이 주소로 물건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인지 보자 했는데 지난주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뒤늦게 찾아보니 행사 전날 혹은 전전날 직접 행사장에 방문해서 키트와 티셔츠를 수령해야 했다. 같은 도시지만 오가는데 3시간 걸렸다. (택시 탔으면 왕복 20분이었으니 불평 금지. 그렇지만 산호세 밖에서 오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닙니까?)


2. 안내가 확실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출발로 인정되는 건지(이건 내 탓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랑 다 같이 출발했으면 눈치코치 확실히 알았을 것)도 뛰는 내내 지금 몇 킬로를 달리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5/10/21/42km가 함께 뛰는데 각각 어디가 반환점인지 표시되어있지 않았다. 키트에 지도가 들어있던데 그걸 보고 알아서 도는 건가? 그래서 출발했던 스타디움에 다시 도착했을 땐 들어가면 되는 건지 눈치를 보다 아무도 그쪽으로 안 뛰길래 그저 사람들을 따라 뛰면서도 설마 지금 21km 달리고 있는 사람들 루트로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10km 사람들은 이미 다 들어갔을 시간이어서 더 그랬다.) 그래 10km 코스 구매하고 가성비 21km 한 번 뛰어보자는 마음으로 달렸으나 이내 다시 스타디움으로 돌아왔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10km를 완주했다.


3. 키트랑 부스 행사가 심플하다. 키트에 뭐가 들어있는지 열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인데 이번 행사 키트에는 무슨 본드 샘플과 어딜 가도 무료로 나눠주는 음료수에 예상치 못한 파스타 면이 들어있었다.(나중에 알고보니 이 파스타 브랜드가 메인 스폰서였다.) 그리고 본질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그래도 티셔츠도 나름 중요한데 대회 등록을 할 때는 사전에 티셔츠 디자인을 알 수가 없었고 키트를 받아보니 여자는 핑크, 남자는 민트 티셔츠였다. 남녀를 구분한 것도 특이한데 색 선택은 더 특이했다. 이렇게 투덜거렸지만 또 막상 집에 오니 티셔츠랑 정확히 같은 색의 바지가 있길래 기왕 이렇게된거 위아래 세트복을 완성했다. 그리고 출발 전 후 부스가 거의 없었다. 작은 마사지 부스에 줄을 섰다가 코스타리카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줄이 전혀 줄어들 생각을 안 해 포기했다. 끝나고 받은 음식은 작은 사과와 바나나였다. 뛰는 중에는 물을 주는데 이 물도 비닐 포장에 들어있어서 처음 급수대에서는 이거 마시는 용이야? 하고 물어봤다. 풀코스는 8만 원, 10k는 5만 5천 원으로 참가비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조금 더 신경 써줄 수 있지 않나..!


4. 엄청난 응원과 관심을 받았다. 앞에 적은 사정으로 뒤늦게 혼자 출발하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평소에도 눈에 띄는 동양 여자애가 이미 모두 떠난 도로 한복판에서 혼자 뛰고 있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응원해 줬다. 초반엔 길에 응원 나온 (남의) 가족들, 친구들이 엄청 응원해 주고 여기로 가야 해 저기로 가야 해 길을 계속 알려줬다. 그러다 중반엔 슬슬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선수들이 생겼고 이내 아주 많아져서 모든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계속 응원해줬다. 아니 저 느리지만 포기 안 하고 꾸준히 달리고 있는 사람 아니고('느린' 부분은 맞지만) 그냥 우버 못 잡아서 늦게 도착해 방금 뛰기 시작한 사람이에요.. 나중엔 산호세 중심부까지 코스가 이어져서 구경 나온 가게 상인까지 응원해 줬다. 말 타고 있는 경찰들도 지나쳐왔다. 더 시간이 지나서는 풀코스인지 하프코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창 뛰고 오신 선수들이랑 코스가 겹쳐서 옆에서 경찰 오토바이가 경호해 주는데 중계 영상도 찍고 있어서 옆에서 머쓱하게 뛰었다.(어차피 곧 지나쳐 가셔서 머쓱도 찰나임.) 스페인어로 된 모든 종류의 응원을 다 들었는데 사이 사이 아자잣 치나! 하는 게 거슬렸지만 당장 이 길이 맞나에 신경 쓰느라 그래.. 다들 좋은 마음이잖아.. 하고 넘기다가 마지막 들어갈 땐 여유가 좀 생겨서 저 치나 아니고 꼬레아나예요! 했더니 다들 아자잣 꼬레아나!! 해줬다.


5. 기록을 알 수가 없다. 사실 이건 100% 내 탓이다. 아니 사실 70%만 내 탓이다. 글을 쓰다가 찾아보니 기록이 있긴 있다. (근데 왜 안내든 기록이든 메일이나 문자는 한 번도 안 보내주십니까!) 그렇지만 mass start 방식이라고 단순히 6시에서 피니쉬 지점을 통과한 시점까지의 시간을 재나 보다. 어제 run away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또 run 해야 해서 도망도 못 가겠어하고 있으니까 친구가 1등은 못해도 새로운 경험으로 충분하지!라고 응원해 줘서 뒤에서 1등만 안 하면 좋겠다~했는데 지금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정말 내 나이 그룹에서 뒤에서 1등을 했다. 그렇지만 저는 6시 30분 즈음 출발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계산하면 진짜 앞에서 1등임. 파티 안 하고 뭐하냐.


6. 마라톤 대회의 본질과 하등 상관없지만, 한국 떠나와 여기 저기서 찍어주시는 사진들을 보면 이게 현실의 나..?할 때가 많다. 외국에 나가도 한국인 찾아서 부탁하면 사진 성공 확률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닌데 나도 잘 못 찍는데?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저렇게 찍혀보니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신 다들 엄청나게 친절해서 혼자 셀카라도 찍고 있으면 와서 사진 찍어줄까? 물어봐준다. 이번 행사 때도 그저 포토존에 줄을 서있었는데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 ¿Cómo te fue? 하며 다가오길래 아주 경계했는데 그저 혼자 있으니 사진 찍어주려고 온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오랜 줄을 기다려서 포토존에서 찍긴 했지만 이번 행사에서 이 꼬모떼푸에님의 사진만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진으로 남았다.


7. 마라톤도 러닝 제품도 너무 비싸다. 코스타리카 물가도 원래 높고 또 러닝 제품들 한국에서도 원래 비싸지만, 너무해요. 이번주 내내 코국 다이소 pequeño mundo에서 러닝벨트를 찾다 포기했는데 어제 키트 픽업 왔더니 옆에서 러닝벨트를 팔고 있었다. 단돈 5만원에! 물론 조금 덜 멋진거지만 한국 다이소에서 2천원에 판단말이에요. 그래서 핸드폰을 어떻게 하고 뛰었냐면.. 코스타리카 오면 맨날 물놀이할 줄 알고 챙겨 온 방수팩에 넣어서 팔에 고정시켜 놓고 뛰었다. 한국에서 짐쌀 때 방수팩 챙길 정신에 운동 관련 물건들 좀 제대로 챙겨 올 걸 그랬다. 근데 방수팩으로 만든 암밴드 생각보다 나쁘지 않음. 항상 러닝 할 때 신던 신발, 여기에 있을 리가 없어서 지난번에 화산 가서 함께 고생한 그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 슬프게도 이젠 구멍까지 뚫려버린 이 신발도 보내줄 때가 다가오고 있다.


8.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스타디움 한 바퀴었다. 처음엔 스타디움 밖을 한 바퀴를 돌고 산호세 시내 까자 갔다가 스타디움으로 다시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마지막엔 스타디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서 육상 트랙을 한 바퀴 돌았다. 3만 5천 석의 관중석이 있는 큰 경기장이었는데 아주 일부 응원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냥 이런 큰 공간의 육상 트랙에서 뛰는 기분이 새로웠다. 그리고 옆엔 이미 빠르게 달려온 하프코스 전문 선수들이 함께해서 클라스 자체가 다르지만 괜히 나도 그중 일부인 것 같은 기분으로 마지막 그 한 바퀴는 가장 빠르게 뛴 것 같다.


9. 노래도 대화도 없이 고요 속에 달렸다(밖은 시끄럽긴 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노래라도 없으면 내가 달리고 있는 이 현실에 너무 집중되어서 멘탈이 힘든데 오늘은 너무 정신없이 나오느라 충전기에 꽂아놓은 에어팟을 까맣게 잊고 나왔다. 오는 길 내내 잠깐 집 갔다 온다고 말할까 고민하며 걱정했지만 이 내적 갈등의 시간이 무색하게 뛰는 내내 신경 쓰이는 외부적 요소가 너무 많아 힘든 걸 하나 모르고 뛰었다. 한국에서 10km를 뛰면 중간중간 너무 힘든 순간들이 있는데 이제 보니 그건 그냥 비빌 구석이 있으니 그런 거였다. 응원해 주는 사람들에게 하하 그라씨아스~ 머쓱 머쓱하다 보니 달리는 내내 힘든지도 몰랐다. 기록상 꼴찌 했으면서 왠지 다음엔 정말 하프에 도전해보고 싶은 기세만 좋은 재능 없는 러너.. 그래도 이번에도 끝까지 걷지 않고 쭉 뛰었다!


10.


쓰다 보니 저녁 4시 30분이 되었는데 알람이 울렸다. 아이폰 업데이트 때문에 새벽 4시 30분 알람이 안 울린 게 아니었다. 저녁 4시 30분에 알람 맞춰놓은 바보 사람.


귀가 후 진짜장 위에 닭가슴살을 올려먹으려고 팬트리를 보니 누가 너구리 라면에 ESTHER라고 적어 넣어뒀다. 알고 보니 옆방친구에게 지난번 신라면 하나 챙겨줬더니 너구리라면을 발견하고 내가 생각났다고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짜장면 비스무리를 만들어 먹으며 훈훈한 마음까지 올려 더욱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나도 엄마 아빠나 언니 오빠들이 와서 응원해줬으면 좋았겠다. 한국에서도 혼자 뛰면서, 아니 한국에선 애초에 엄마 아빠가 응원 오는 사람이 어딨어. 심지어 10km 밖에 안 뛰었으면서! 그래도 그냥 괜히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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