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 영화관에서 위키드 보기
2024.11.29. (금)
3개월 간의 스페인어 수업이 끝났다. 아베쎄데ABCD도 모르는데 첫날부터 수업의 목표 읽어보라고 스페인어로 말 걸던 선생님.. 첫 수업 녹화본을 다시 열어보니 읽어보라고요? 읽어보라고요? 그게 뭔데요? 하고 있는 3개월 어린 내가 보인다. 수업하다 새로 보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무슨 뜻일 것 같냐고(몰라서 질문한 건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역질문해서 질문하기 싫게 만들어놓고 넌 왜 맨날 SíSí만 하냐고 혼내던 선생님.. 과거 시제 연습하는 척 질문해서 알고 보니 95년생이라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게 만드셨던 선생님..
그냥 수업 종강이지만 지난 3개월간 운동도 스페인어도 월화수목금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해온 것이 기특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말도 안 통하는 낯선 이곳에서 아무튼 살아냈잖아! 일도 출근도 없이 월급만 받으면 좋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운 날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땅에 발붙이고 살게 해 준 것이 의외로 이 스페인어 수업과 운동이었던 것 같다.
잘 못 알아듣고 따라 하다 목 부러질까 봐 무서워서 못 가던 요가 고급반 수업도 오늘 마지막 날 용기 내서 처음으로 가봤다. 이어서 오늘 주짓수 상담받으러 갈 용기까지 냈다. 여전히 누가 말 걸면 눈알만 굴리지만 네일 받으러 가서 친구 먹고 그 가족들이랑 같이 피크닉 갈 정도는 됐다! (나는 이거 한국에서 한국어로도 못하니까 대단한 거임) 여전히 마음 붙일 곳은 없지만 그래도 그냥 산다. 왜냐면.. 그것이 인생이니까..(인생 선배 남동생이 알려줌)
갑자기 여러 감정으로 눈물 찔끔할 뻔했는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다음 코스 시작에 또 같은 선생님에게 배정돼서 괜히 눈물 찔끔 낭비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 1대1 개인 수업은 끝난..! 이제 다른 나라에 계신 동료 한국인 분들이랑 같이 수업하게 듣게 된..!) 혼자 종강파티라고 연구소 앞 바에서 회사 동료가 추천해 준 chifrijo를 주문해 보았는데 또 콩죽이었다. 그렇지만 맛있게 먹는 방향으로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젠 콩죽도 잘 먹고.. 코스타리카 사람 다 된 거 아닙니까?
아니다 한참 멀었다. 이런 마음으로 집 앞 주짓수 체험 수업에 왔는데.. 딱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살아남으려면 싸움이든 스페인어든 좀 더 잘해야 한다. 그 많고 많은 수업 중에 그나마 fundamental이라고 쓰여있는 애로 골라온 건데 왜 대련해야 하는 건데요.. 처음엔 팔 한쪽으로 앞구르기 뒷구르기 포복 뭐뭐뭐 웜업을 빡세게 시키시더니 기술을 선보이시고 자 이제 해봐 하곤 그래도 영어 할 수 있는 회원님이랑 붙여주셨다. 나중에 좀 더 대화해보니 이전에 유도를 하시던 분이라고 했다. 몇 년 하셨는데요? 나 지금 60살인데 평생 했으니까 50년은 넘었겠지? 하셨다.
주짓수, 확실히 멋지지만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선 나에게 조금의 더 실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빨리 다른 운동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제 네일 친구와의 일정이 길어져 포기했던 위키드를 저녁에 꼭 봐야 한다. 빠르게 씻고 외출준비를 하는 동안 고구마를 삶았다. 삶은 고구마를 손에 들고 집에서 멀지 않은 영화관으로 향했다. 티켓은 현장에서 구매하고 부스에서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이미 메인은 엊그제 개봉한 모아나2로 넘어간 것 같아 보였다. 위키드 부스도 있긴 했지만 모아나2에는 모아나 분장을 하고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도 나와 있었다. 저는 모아나2 보는 사람 아니긴 한데 같이 사진은 찍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오늘 영화랑 상관도 없는 모아나랑 사진도 찍고 위키드 상영관으로 향했다.
영화 5분 전에 착석해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가능한 자리가 별로 없던 것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아 좋았는데 그저 천천히 여유롭게 들어오는 문화였던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정말 영화관에 와서 보길 잘했다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 코스타리카에도 영화관 빌런들이 적지 않았다. 뒷사람들은 킄킄 거리며 큰 소리로 대화했고 앞사람은 자꾸 화면을 카메라로 찍었다. 자꾸 플래시를 켜는 사람들까지 있었는데 내 옆 가족은 결국 앞자리로 옮겨간 것을 보면 여기가 비정상적인 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과 무관하게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살면서 영화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없는데 그냥 지금 본인 상황 때문인 건지 아니면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뭔지 보는 내내 자꾸 눈물이 줄줄 흘렀다. 딱히 울 내용도 아닌데. 레미제라블 최애곡은 On My Own, 라라랜드 최애곡은 Audition(The Fools Who Dream), 위키드 최애곡은 For Good이라 영화 내내 I've heard it said, that people come into our lives~만을 기다렸는데 마지막 장면에 부를까~말까~하는 것 같더니 그대로 막을 내렸다. 아쉬운 마음에 찾아보니 이건 2막에 나오는 노래라고 했다. 2막의 내용을 담은 파트 2는 내년 11월에 개봉한다고 하는데, 과연 나는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파트 2를 보게 될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츄러스 아저씨를 마주쳐서 괜히 저녁은 고구마 먹고 야식으로 츄러스 먹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바로 자기에는 양심에 찔려서 예전에 썼던 글들을 좀 읽어보다가 2018년에 베네치아에 교환학생으로 입주하기 하루 전날 런던에서 레미제라블 뮤지컬을 보고 난 뒤 크게 감동받아 위키드 뮤지컬을 봤다는 일기를 발견했다.
당시에도 내일 제대로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엄청 걱정하며 뮤지컬을 봤다고 했는데 오늘도 역시 비슷한 걱정을 갖고 영화를 본 게 참 한결같으면서도 웃겼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 잘 해결될 일들인데, 이렇게 사서 걱정을 한다. 인스타엔 자꾸 위키드 관련 밈과 영상들이 올라오는데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글리 영상을 많이 봤다. 글리를 보면 순식간에 중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정말 열심히 봤는데.. 아마 지금의 영어의 80%는 하이스쿨뮤지컬이, 나머지 20%는 글리가 차지하고 그 사이 0.01 모래들을 학교 책들로 채우지 않았을까? 스페인어도 이런 콘텐츠를 찾으려면 위키드를 더빙판으로 한 번 더 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