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서 한복을 입고 빛의 페스티벌 퍼레이드에 참여했다!
2024.12.14. (토)
코스타리카에선 매년 크리스마스, 연말을 맞아 12월 두세 번째 주말 즈음 Festival de la luz 빛의 페스티벌이 열린다. 반짝거리는 것들로 꾸민 차들과 함께 사람들이 퍼레이드도 하고 불꽃놀이도 하는 큰 행사이다. 11월 즈음부터 뉴스에서도 계속 관련 내용이 나오더니 친구들 몇 명이 페스티벌에 가고 싶은지 물어봐주어서 함께 가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중략)..의 과정을 거쳐 결국 직접 한복을 입고 퍼레이드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중학생 때 해금 무대를 위해 입었던 한복이 마지막이었으니 코스타리카에 들고 온 한복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직전에 다른 분께서 빌려주신 분홍색 한복을 입고 퍼레이드에 참가하게 되었다. 분명 빛의 퍼레이드니 해가 지고 나서 출발할 것 같은데 아침 7시까지 모이라는 말에 의아했지만 지난번 마라톤 행사날보다 훨씬 수월하게 우버를 타고 사바나 공원에 도착했다.
오늘도 오후 행사로 길이 막혀있었기 때문에 기사 아저씨랑 열심히 소통해서 행사장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약속의 맥도날드에는 한두 명의 사람 밖에 없었다. (아침 시간대에 맥도날드에 가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듣던대로 정말로 아침 메뉴로 맥모닝 말고도 가요삔또를 팔고 있었다!) 이후로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 여덟 시 즈음이 다 되어 행사 준비 장소로 다 같이 향할 수 있었다.
행사 준비 장소에는 헤어와 메이크업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사실 행사 준비 장소라는 게 어제까지도 수업을 하던 중고등학교 교실이라 학생들이 공부하는 책상에 앉아서 헤어를 받는 형태였다.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내가 직접 헤어 시안을 제안해야 했다. 급하게 주변에 헤어를 받고 있는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둘러봤다. 머리카락로 리본 모양을 만들고, 파란색 가모를 넣어서 촘촘히 땋고, 쟈스민 공주 머리에, 전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문득 어렸을 때 꼭 해보고 싶다 리스트에 있었던 드레드록스(aka 레게머리)까지 떠올랐다.
그렇지만 한복을 입고 이런 머리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니 한국에 있는 전담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평생 내 전담 헤어디자이너..인 엄마가 금방 전화를 받아 아빠랑 셋이 급하게 가족회의를 해서 시안 몇 개를 뽑아냈다. 머리를 해주시는 분에게 사진을 보여드리며 머리를 넘기는 방식에 대하여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드렸다. 한국과 중남미의 꾸미는 스타일에 여러 차이점들이 있겠지만, 처음 코스타리카에 도착했을 때부터 눈에 띄었던 것이 바로 머리를 묶는 방식이었다. 한국은 잔머리도 내고 좀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머리를 묶는 느낌이라면 중남미 여성분들은 머리카락 한올도 남김없이 올백을 해서 깔-꼼하게 머리를 묶은 뒤 가끔은 여기에다 빤딱빤딱 헤어 제품을 발라 더욱 바짝 머리를 묶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보였다.
안 그래도 머리도 업스타일로 묶는데 앞, 옆머리를 그렇게 사정없이 넘겨버리면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 이렇게 말고 이렇~게 나뚜랄하게 자연스럽게 부탁드립니다! 를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자연스럽다조차 한국인의 기준이었구나 싶다. 부족한 스페인어 소통 실력에 비해 금세 완성된 머리는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지만 그 뒤로 메이크업을 받기 위해 또 몇 시간을 교실에 앉아 대기해야 했다. 오전 내내 교실에 멀뚱히 앉아 속으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새벽 일찍 모여서 내내 기다려야 하는 건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행복의 티코, 티카들은 교실에서 잠도 자고 춤도 추고 게임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서 또 한 번 배웠다.
몇 시간의 대기 끝에 나도 메이크업을 받게 되었는데 메이크업도 시안을 보여 달라고 했다. 메이크업 시안은 드릴 수가 없어요 왜냐면 전담 메이크업 선생님께서 이제 주무시거든요.. 핀터레스트를 켜서 메이크업을 해주시는 분이랑 같이 여러스타일을 보기 시작했다. 아시안 메이크업 사진들을 검색해서 보여주신 사진들에선 다들 코에 블러셔를 발라 코가 빨갰다. 이것이 혹시 내가 떠나온 사이 시작된 새로운 트렌드..? 아니면 혹시 크리스마스 루돌프 에디션..? 내 눈엔 사실 다 비슷해보여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어떻게 화장을 하는지 궁금해서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기본 베이스는 내가 가져온 화장품으로 스스로 한 뒤 아이메이크업부터 시작했는데 우선 베이스 쉐도우로 잡아주시는 아이홀의 면적부터 남달랐다. 아니 난 애초에 아이홀이라는 게 없지.. 왜인지 마스카라는 뷰러도 찝지 않고 하시길래 급박하게 내가 먼저 뷰러 찝고 할게!하고 마스카라를 받아 들었는데 마스카라 솔이 빗처럼 생긴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브론징인지 쉐딩인지 갈색 파우더로 관자놀이를 치는 것도 신기했고 어두운 색 섀도우를 긁어서 아이브로우를 그려주시는 것도 신기했다. 요즘 한국에서도 오버립을 그리는 립라이너가 조금씩 유행하긴 하지만 쓰는 친구를 자주 보진 못했는데 여기선 립라이너가 필수 아이템인 것도 새로웠다.
교실의 책상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으니 거울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다 됐다! 하는 이야기에 약간 설레는 기분으로 거울을 들어 내 얼굴을 보고선 한참 웃었다. 나중엔 결국 내가 다시 수정해야 했지만 즐겁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 내내 기다림+헤어메이크업을 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밥을 먹고선 한복으로 갈아입어서 이제 곧 시작하나보다 싶었는데 오후 3시까지 또다시 대기해야 했다. 도대체 왜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야 했던 것인가? 한국인 자아와 여긴 중남미다의 생각이 싸우고 싸우다 한국인 자아가 이겨 성격이 조금 나빠질 즈음 드디어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사실 뭘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는데 뒤에서는 같이 헤메를 받았던 댄스그룹 친구들이 케이팝 춤을 추면 그 앞에 서서 그저 열심히 웃고 손을 흔들면 되는 역할이었다. 공원에서 시작해서 산호세 센트럴에 있는 Barrio Chino까지 3.5km 정도 되는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한 세 시간에 거쳐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방송 카메라도 많고 여기저기서 중계하는 MC분들이 계신 것이 큰 행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저 안녕~하고 다니는 것이 아무 일 아닌 것 같이 느껴지면서도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을 대표한다!라는 생각에 세 시간 내내 열심히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함께 퍼레이드를 했던 코스타리카 친구에게 들어보니 보통 디즈니랜드 같은 곳에 가야 이런 퍼레이드를 보는데 모두가 그런 여행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이런 행사를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하루종일 퍼레이드를 기다린다고 했다.
퍼레이드의 마지막 지점인 차이나타운에 도착했다. 나는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나아가면서 춤까지 췄던 뒤의 댄스그룹 친구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그리고 당장 이 한복을 입고 집까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아득했다. 페스티벌로 사람들이 너무 몰려 우버를 잡기도 쉽지 않았다. 그 때 퍼레이드에서 코스타리카 전통 옷을 입고 같이 참여했던 친구의 부모님께서 픽업을 와주셨다. 덕분에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씻는데 머리 고정을 위해 꼽혀있던 핀이 한 서른 개는 나왔다. 뉴스를 틀어보니 우리 퍼레이드 뒤로 행사의 메인 퍼레이드가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더 보고 오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저 지금 침대에 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잊지 못할 코스타리카 생활 중 첫 번째 Festival de la luz 행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