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통신사 찾아가서 현금으로 폰 요금을 냅니까? 저요
2024.09.06.(금)
원래도 그렇지만 금요일 사무실엔 사람이 더 없다. 밤새 배가 고파서 아침에 월마트에 들러 또 같은 장바구니 구성-과자랑 바나나와 샐러드를 사 왔다. 아침에 노조 같은 곳의 OT를 들었다. 작게는 공유 자전거 할인부터 크게는 가족 구성원의 대학원 지원까지 내용이 많았는데 대부분 미국 본사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주 마지막 스페인어 수업을 시작했다. 한창 동사의 변형에 대하여 배우다가 오늘은 plurilingüe에 대한 문단을 읽고 오디오를 들었는데 들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저 이제 스페인어 공부 시작한 지 5일째인데 이런 기사를 읽고 다이얼로그 듣고 이해해야 하는 게 맞나요? 그래도 고 며칠 사이에 개미 한 걸음 나아가긴 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화요일에 처음 만났을 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더니 오늘은 그래도 많이 알아들을 수 있었슴당 항상 기다려주셔서 감상당 하고 메일을 썼다.
한참 과자를 집어먹다가 남은 밥에 고추참치에 김으로 점심은 대충 먹고 오후에는 중남미 각지에 흩어져있는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인 동료들과 팀즈로 만났다. 가이드도 없이 그냥 놓여버리는 상황이 당황스럽고 이게 맞나 싶다가도 몇 개월 먼저 합류한 우리 선배님들을 보면 주어진 상황에 절로 감사하게 된다. 우여곡절들이 있었지만 이제 대부분 파트너사로 넘어가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단계인 것 같다. 과연 나는 일정대로 다다음주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될까?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만나기로 일정을 잡고 미팅을 마무리하고 또 한 번 은행 앱을 열어 잔고를 확인했다. 며칠 이내로 첫 번째 페이와 이주비용이 들어올 거라고 했는데 역시 아직 받은 인보이스도 없는 걸 보니 다음번 주기가 돌아와야 뭐든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포기하고 리스크를 감수하고 ATM에서 한국 카드로 보증금+첫 번째 월세를 뽑아오기로 했다.
지난번이랑 다른 은행의 ATM을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이 자식이 내 카드를 먹는다면? 그렇지만 그 일주일 사이 수중에 두 개의 카드가 더 생겼고-물론 각각 0 콜론, 0달러가 들어있지만 이웃나라에 계신 한국분이 또 다른 옵션이 없다면 도와주시기로 했다! 믿을 구석 구석의 용기를 끌어모아 ATM에 카드를 넣었고 1만 원의 수수료와 함께 현금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성공의 기세를 몰아 핸드폰 요금도 내보고자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처음 개통할 때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모르겠으면 나에게 연락해!라고 했던 친구를 찾아 통신사에 직접 가기로 했다. 아니 나 그래도 통신사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핸드폰 요금을 낼 줄 몰라서 직접 통신사 찾아가는 게 맞나? 비가 오는 중에 또다시 이걸 그냥 건너도 되는 게 맞나 싶게 넓은 도로들을 운전자들의 배려로 무단횡단하고(아니 이게 여기선 무조건임) 쉽지 않게 도착한 통신사에서 이번달 요금을 내고 다음번부터 은행 앱으로 요금을 납부하는 방법을 배웠다.
오늘은 Escazú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지난 3주를 이곳에서 보내면서 마음고생도 했지만 이제 길도 사람도 어느 정도 눈에 익고 첫 적응의 과정을 함께했던 약간 애틋한 마음이 생긴 동네다. 오늘이면 정말 계좌에 돈도 들어오고 여러 고민도 다 해결되어서 좋은 마음으로 좋은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여전히 0달러 계좌를 들고 어딜 가기도 애매했다. 그러던 중 교회까지 차로 픽업해 주시던 분께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을지 연락을 주셨다. 네!! 네!!! 네!!!! 무엇을 먹고 싶냐고 하셔서 역시나 무엇이든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또 우연히 회사랑 집이랑 걸어 다니면서 항상 오 저기는 뭐지하던 레스토랑에 데려가주셨다. 저 이번주 내내 1일 1식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남은 고추참치랑.. 컵누들 먹고살았는데요 갑자기 이런 스테이크에 와인.. 괜찮은 건가요?
안 괜찮았다. 마지막 코스로 찍어주신 스타벅스에서 결국 찾아온 미주신경성 어쩌고.. 사실 전에도 아주 편하지 않은 자리에서 몇 번 찾아오려고 했었는데 오 지금 내가 넘어가버리면 얼마나 서로 당황스러울까 싶어서 꾹 눌렀다. 그렇지만 이런 1:1 자리는 신경이 분산될 곳도 없고 내가 계속 리액션이든 질문이든 해야 하니까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결국 양해를 구하고 잠시 쉬고 이겨냈다! 원래 와인+답답한 옷/마스크+대중교통이 구성 요소라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해당되는 게 와인 하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여기 고도가 1200-1600미터 정도 되어서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다음번부터는 신이 나도 와인은 자제해야겠다. 그렇지만 그래도 좋아요 또 눈물의 배고픈 밤 (배고픈 건 디폴트인데 뭔가 기념하지 못해서 눈물 나는 거임)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평소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도 가고 스테이크도 먹다니! 집으로 돌아와서는 짐을 챙겨야 하는데 피곤해서 그냥 자버렸지 뭐야. 오늘 수수료는 냈지만 돈도 뽑았고 통신사까지 직접 가야 했지만 요금도 냈고 쓰러지긴 했지만 마지막 기념 식사도 했어.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