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5. 우리 집이 생겼다

아니 사실 남의 집이지만, 아니 사실 방한칸이지만

by 에스더

2024.09.07. (토)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10시 즈음 친구가 오기로 했는데 9시가 되기 전에 캐리어 문을 닫고 배낭 지퍼를 잠갔다. 노트북을 꺼내 스페인어 수업을 다시 들어보며 시간을 보내다 바퀴 하나가 달랑거리는 캐리어를 들고 방을 나섰다. 계단이 가팔라서 이걸 어떻게 들고 내려가지 아득했는데 잠시 방에 놓고 온 것이 없나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사이 대청소를 하고 있던 에어비앤비 호스트들이 짐을 전부 1층으로 옮겨주었다.


차를 타고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 길에 친구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이 오거나 집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본인 집에 와서 생활해도 괜찮다는 말을 반복해서 해주었다. 일주일 내내 그 친구 어머니가 걱정을 하셨다고 엉엉 그리고 새로운 집에 도착해서 이걸 또 꼭대기까지 어떻게 들고 가지 했는데 빌딩 주인이 영차영차 옮겨주셨다. 결국 또 이렇게 푸라비다의 은혜로 캐리어 한 번도 들지 않고 이사 완료!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는 방을 둘러보고 계약서에 대충 사인을 하려고 했는데 변호사의 직업정신인지 푸라비다정신인지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모두 영어로 번역해서 쭉 읽어줬다. 아니 나 한국어 약관도 이렇게까지 안 읽는데.. 덕분에 꼼꼼히 모든 내용을 확인하고 수정할 부분을 고치고 서명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어제 뽑아온 현금을 꺼내 전달했다.


내 상식엔 보통 무엇이든 오늘 시작했으면 한 달치를 내고 다음 달 동일 날짜에 사이클이 도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어제 핸드폰 요금도 그렇고 오늘 집세도 그렇고 모두에게 동일한 특정 지불 날짜가 있고 첫 달은 그만큼 계산해서 제외하고 내는 게 특이했다. 아침에 먹은 마지막 두 개의 바나나 외엔 먹은 게 없어서 밥 먼저 먹으러 가자! 하고 뭘 먹지.. 하던 중 친구 엄마에게 이사는 잘했는지 전화가 와서 밥을 해줄 테니 집으로 오라고 했다. 빌딩 세탁기가 크지 않아서 빨지 못했다는 이불 두 개도 집에서 빨아서 가져다주겠다고 말해주어 이불을 들고 그렇게 또 한참을 달려 친구 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오는데 좀 시간이 걸려서(중간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고 마트에 갔다가 또 각 아이스크림 종류에 대해 전부 설명을 듣고 뭘 먹을래? 에 그냥 너 먹는 거.. 했다가 여기 와서 아이스크림 처음 먹어봐? 에 그렇다고 답했다가 그럼 이런 걸 먹을 수는 없다! 밥 먹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의 과정이 있었다.) 우리 둘이 나머지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와중에 또 감동 포인트는 쫀득 한국쌀로 밥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오니기리용으로 집에 쌀을 사뒀었다고 밥을 따로 지어주셨다. 이불 빨래를 돌려놓고 밥을 먹고 집투어를 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멋진 집이었다. 약간 학창 시절 이야기하던 땅콩집처럼 집 두 개가 이어져있었고 넓은 마당에 강아지가 다섯 마리나 있었다. 각 2층 집에 방마다 드레스룸과 화장실이 이어져있고 재택근무를 위한 사무 공간도 따로 있었다. 아주 잠시, 들어와서 지내라는 거 괜히 아휴 아니야~했나? 했다 하하


다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시내로 나갔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해서 이번에는 친구 동생이 또 메뉴판 전체를 소개해줬다. 그리고 역시 결국 나 너 먹는 거..로 아이스크림 위에 크림 넛츠 시럽을 뿌린 달달달달이를 먹게 되었다. 한국이었으면 약간 걱정하였겠지만 난 지금 생활을 위한 칼로리가 필요해.. 아이스크림을 먹고 바로 건너편에 코스타리카에서 첫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데려가주었다. 그 앞에는 다가오는 독립기념일을 기념하여 걸린 코스타리카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국기가 걸려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동생을 내려주고 우리는 드디어 장을 보러 왔다. 와중에 어머니가 또 걱정하시면서 보통 마트는 비싸니 오늘은 식료품만 장을 보고 내일 더 저렴한 곳에 데려가줄 테니 나머지 청소도구나 요리도구를 사라고 하셨다. (사실 어머니의 계획은 오늘 그 집에서 자고 내일 같이 가자는 것이었는데 오늘 방에 짐도 풀어야 하고 사실 창문을 열어두고 온 것 같은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약간 걱정되었다.) 대충 장을 보고 잠시 동물병원에 들러 잠시 입원해 있던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 내 다리 사이에 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자식 비에 젖은 발로 나를 마구 밟았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직 우리 집 아님) 어머니가 또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셔서 타주시는 따뜻한 커피+우유+꿀에 마트에서 사 온 빵을 간단하게 먹었다.(빵이 아주 맛이 있었다? 이 나라 빵을 잘하나보다.) 예전에 월요일마다 풋볼을 하러 가시는데 언제 한 번 와라~하셔서 그저 좋아요~했는데 빵을 먹으면서 발 사이즈를 물어보시더니 갑자기 신발을 신겨보시고 이거 신고하면 되겠다! 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뽀송-향긋해진 이불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지도 못하게 하루종일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도 난데 황금 같은 토요일 하루종일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운전해 주고, 통역해 주고, 짐 옮겨주고, 밥 먹여주고.. 도착해서도 모든 짐을 같이 방에다 옮겨주고 비가 새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대걸레를 구해다 주었다. 대충 물을 닦고 계획처럼 짐을 풀지는 못하고 그냥 뻗어버렸다. 너무 고맙다.. 빨리 월급 받으면 맛난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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