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1.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기까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by 에스더

2024.09.23. (월)


눈을 뜨자마자 점심으로 먹으려고 싸두었던 도시락을 까먹었다. 주말 내 쌓인 김치부침개와 볶음면에 갈비찜을 차곡차곡 쌓은 도시락이었는데 갑자기 죄다 먹어버렸다! 대신 김치볶음밥을 가방에 챙겨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 위해 연구소에 다녀왔다. 주말에 해온 인터뷰 숙제를 자랑스럽게 발표하고 수업을 마쳤다. 바로 학생 식당으로 가려다가 아침을 잘 챙겨 먹고 나와서인지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지난주부터 벼르던 카페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혼자 가서 주문해 먹는 것은 처음이라 긴장된 마음으로 카페 후보군들을 뽑아보았으나 결국 친구와 함께 한 번 가보았던 크레페를 파는 카페에 가기로 결정했다.


가는 길에 미리 메뉴를 찾아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려고 했는데 차가운 커피 메뉴는 단 것 밖에 없는 것을 확인했다. 지난 토요일에 갔던 카페에서도 그렇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대중적이지 않나 보다. 지금까지 커피를 마셨던 브릿이나 스타벅스에서는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있어서 다들 마시는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이탈리아에서도 차가우면서 달지 않은 커피를 찾기 어려웠는데 커피가 맛있는 곳에서는 따뜻하게 해서 그 맛을 깊게 느끼려고 하는 것일지도!


약간 샹각하던 시나리오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종업원을 마주하고 저 스페인어 못합니다!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 따뜻한 까만 커피를 주시는데 얼음 넣어서 차갑게 해주는 것을 원한다!(라고 말했다고 믿는다.)와 이 크레페도 하나 주세요. 하고 번호표를 받아왔다. 혹시 내가 숫자를 못 읽을까 싶어 친절하게 'diez'라고 부르면 와야 해!라고 온몸으로 표현해 주셨다. 숫자? 이미 지난주에 뗐죠~생각보다 수월하게 아이스아메리카노(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으나 따뜻한 커피에 얼음을 넣은 것이라 이거지! 싶게 차갑진 않았다.)와 suzette 크레페(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지난번에 친구랑 같이 와서 먹었던 pollo primavera가 훨씬 맛있었다.)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한국에 있을 때는 집에서 절대 할 일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집 밖에서 모든 일을 하는데 외국에 나오면 사무실, 집,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일을 하는 것이 어색한 환경이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코스타리카도 비슷해서 그럼 친구도 없이 혼자 카페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다 전 회사 동료가 추천해 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책을 빌려 아이패드에 다운로드하여 왔다. (사실 추천만 전 회사 동료에게 받은 게 아니라 책 다운도 전 회사 전자 도서관에서 받았는데 이건 왜 계정이 만료가 안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전까지 열심히 뽑아 읽어야지.)


이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찌그러진 동그라미 에피소드를 읽고 마음에 오래 남았는데 책 제목으로까지 달려 나온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나 보다. 혼자 주문에 성공하다니 프로페소라에게 내일 꼭 자랑해야지! 하며 커피를 한 입 마시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지만 방해공작이 있었다. 바로 옆자리 cc의 쪽쪽 소리였다. 알겠다고 너희들 서로 사랑하는 거 다 안다고.. 그렇지만 이곳은 중남미.. 거기에 스무 살 위아래로 가득한 캠퍼스..! 이어폰을 꽂고 김창완 님의 노래를 들으며 한창 책을 읽었다.


배가 고파질 즈음 책을 덮고 학교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청설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고 순간 핸드폰을 들었다가 방금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나 눈으로만 쫓아봤다. 늦은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스페인어 숙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 사이 집주인이 내가 개미 통로에 돌돌 붙여둔 테이프를 뜯고 실리콘으로 막아뒀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저녁엔 배가 덜 고플 줄 알았는데 집에 오자마자 또 남은 갈비찜에 볶음밥까지 맛있게 먹어버렸다. 이게 다 흑백요리사 때문이다. 나는 맛있는 것도 맛있게 너무 맛없지 않은 것도 대충 맛있게 먹는 편이라 화면 속 요리사들을 보면서 와 저렇게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고? 신기하고 궁금한 마음뿐이었는데 자꾸 음식 보여주니까 배고프잖아.


날이 흐렸어요. 봄 햇살 가득한 아침에 빛나는 벚꽃도 화사하고 좋지만 흐린 하늘 배경에 보니 한지에 그려 넣은 것처럼 운치 있어 보였습니다. 벚꽃이 핑크빛이 다 빠져서 아주 하얗던데 정말 사진 안 찍고 꽃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도 인내심이 필요하더군요. 무턱대고 사진 찍기, 참 나쁜 습관이에요. 좋은 거, 예쁜 거 보면 우선 마음에 담아서 내 마음을 덥히고 감사한 마음을 한 번 더 가져볼 법도 한데 우선 사진기 들고 찍기 바쁩니다. 마음이 사물에 다가갈 틈이 없는 거예요. 돌이켜보니 차라리 사진 안 찍고 아쉬워하면서 예쁘게 핀 벚꽃 보고 또 보고 한 번이라도 더 눈 마주치길 잘했구나 싶네요. 휴대폰 꺼내서 그걸 찍었다면 ‘잘 담아놨지.’ 하는 마음에 아쉬움도 안 남았을 것이고 보기도 덜 봤을 거예요. 마음도 놓치고 풍경도 놓친 거지요. 4월의 바보가 따로 없습니다.
휴대폰 사진을 보면 언제, 어디서 찍었는지 다 기록을 하잖아요. 만약에 우리의 추억도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같은 세세한 것들이 함께 기록으로 남는다면 그게 과연 추억이 될 수 있을까요? 추억은 일기장과는 또 다른 일인 것 같아요. 한마디로 아름답게 윤색될 수 있어야 추억이라는 거죠. 그래서 궂은일도 용서와 화해와 나아가 사랑이란 액자에 넣고 보면 그럴듯한 추억이 되지요. 아름다워서 추억이 아니라 추억이라서 아름다운 겁니다.

-마음이 다가갈 틈,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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