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변천사: 에스더->에스떼르->스떼르
2024.10.28. (월)
정말 집에만 오면 펑펑 뎅굴거려주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당장 오늘 스페인어 과제도 안 했고 아빠아 나 너무너무 힘들었어, 엄마아 이거 전부 빨아줘의 아빠도 엄마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바로 출근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거다. 우선 진흙에서 구른 모든 옷들을 적당히 빨래 비누로 빨아줬다. 바로 세탁기에 넣으면 안 될 것 같아 간단히 빨고 넣거나 아니면 아예 손빨래로 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헹궈도 계속해서 흙탕물이 나와서 여기까지만 하자 싶었다. 비누칠을 해두고 급하게 스페인어 과제를 시작했다.
프로페소라.. 나의 이 힘듦과 눈물에 공감해 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스페인어를 사용해야 했던 극한의 상황에 아주 흡족해하셨다. 선생님은 그냥 제가 스페인어만 쓰면 다 좋으시죠? 그래서 주고받는 말들을 알아들었냐는 질문에 초반에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 주제를 이야기해 주면 그 뒤로는 말은 못 해도 뭔 이야기 주고받는지는 알겠습니다.. 하고 약간의 거짓말을 했는데 아니 처음에 주제 설명 안 해주면 대화 이해 못 해? 하면서 또 나를 훈련시키셨다. 내 스페인어를 어느 정도로 파악하고 계신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따레아가 얼마나 많았는지 무슨 첨삭을 하다가 하다가 수업시간이 다 가버려서 새로운 따레아를 받아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무슨 숙제를 내주셨냐면, 바로 다시 돌아온 길 물어보기. 지난번에 해온 게 성에 안 차셨는지 진짜 길거리로 나가서 물어보고 다니라고 아는 사람한테 말 걸기는 금지하셨다. 무슨 길거리예요~ 지금 침대 밖으로 나갈 힘도 없는데!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서 빨래를 마저 이어 나갔다. 양말에, 신발에, 바지에, 가방에, 수건에, 털 달린 외투에.. 몰래 다 어디에 넣고 까먹어버리고 싶다 생각이 들 즈음 얼추 마무리가 되어 세탁기에 뒷일을 부탁하고 그 사이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문 앞에 모든 허물을 놓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서 흙이 나왔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이 흙들과 함께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얼마나 내가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는데 이곳 사람들한테는 크게 공감받지 못하였다. 그럼 보통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등산 가자고 하면 이런 걸 생각하고 가야 하는 거야? 하고 물어보니에 음 굳이 비가 오는 날에 가진 않겠지만 막 특이하진 않다고 했다. 네? 나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자꾸 선생님이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한테 길을 물어보라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더니 그럼 길을 설명하기 좀 더 쉬운 센트럴에 가서 물어보면 간단해 질 것이라는 팁을 줬다. 아니 나는 그 길 찾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길거리 모르는 사람들한테 스페인어로 말 걸고 싶지가 않다는 건데..
진짜 집에 오면서 사람들이랑 와 이번주는 각자 헬스장 진짜 절대 안 가도 되겠다. 침대에 꼭 붙어있자 했는데 또 막상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좀 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월요일이고 아마 11월엔 다른 운동을 등록하게 될 것 같아서 매주 월요일 수업마다 엄청 반겨주시는 분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빨아서 아직 마르지도 않은 운동화를 신고 저녁 수업을 위해 집을 나섰다.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수업을 듣는 내내 또 혼자 한 박자 늦게 쫓아가면서 집에 있을걸 싶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 덜 마른 운동화는 밟을 때마다 양말에 그 남아있는 진흙이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한 박자씩 느리게 따라 춤을 추고 대망의 Arby's로 향했다.
Arby's는 안에 햄을 잔뜩 쌓아주는 미국 햄버거 가게다. 사실 지금까지 딱 한 번 가봤다. (이후 구구절절 주의) 미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같은 단과대에서 한국인이 딱 세 명 파견되었다. (언니, 오빠 아주 설마 혹시 보고 계시다면 다들 결혼도 이미 하고, 행복하게 잘들 지내고 계시고, 또 아주 옛날 일이니까 팩트만 쓸게요.) 각자 주로 노는 친구 무리가 서로 달랐는데 그래도 한 번 한국인들끼리 어디라도 다녀오자 해서 야간 버스를 타고 뉴올리언스에 여행을 다녀왔다. (지금 찾아보니 거의 8시간 걸리네 이걸 어떻게 차를 타고 갔지)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갔는데 뉴올리언스는 좀 위험하기도 하면서 재미있고? 그 왜 비즈 목걸이 걸어주는 재즈와 유흥의 도시였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는 이미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있었지만 미국 나이로 미성년자였다. 그래서 술이 있는 곳에 가면 손등에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표시를 그리고 입장해야 했다. 아무래도 그런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이 불편했나 보다. (그럼 플로리다에 있을 때 미리 말해주지!) 그래서 나를 뗴어놓기 위해 그럼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이따 밤에 다시 만나자! 해놓곤 둘이서만 따로 연락해 만난 것이었다.
이 도시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길에 너무 많았던 노숙자들을 피해 스타벅스에 있다가 마감 시간이 되어 혼자 드럭스토어에서 기다리다 다 놀고온 언니 오빠를 만났다. 숙소에서 짐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둘 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상처 입은 마음으로 플로리다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 내가 평소 같이 지내던 친구들이 나에게 bossy 하게 군다고 했나..아무튼 무슨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어떤 부분을 그렇게 느꼈는지 이야기를 하면서 풀 텐데 여러모로 몸도 정신도 힘들어서 지쳤다.
그때 아래층에 살던 홍콩에서 온 다른 친구가 야 다 됐어 내가 있잖아! 저녁 먹었어? 밥 먹어 밥! 하면서 그 늦은 시간에 같이 자전거를 타고 (지금 구글맵에 찾아보니) 10분 정도 걸리는 Arby's에 데리고 왔다. 훌쩍 훌쩍 주문을 했는데 그 와중에 내가 주문한 것이 잘못 나왔다. 밤이 늦기도 했고 당시 일하는 분들이 무섭기도 해서 그냥 먹을래.. 했는데 아니야 내가 바꿔올게! 하더니 영어도 부족한 데다 나랑 체구도 비슷하면서 흑인 형님들에게 이거 주문 잘못 나옴!해서 햄버거 하나를 더 받아다 줬다. 덕분에 그걸로 다음날 아침까지 먹었다.
쓰고 나니 별 이야기 아닌 것 같지만 마음이 팍팍해질 때 가끔 이 기억을 꺼내봤던 것 같다. 이후에도 힘든 날엔 꼭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모두가 플로리다를 떠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아쉬운 마음에 엉엉 울 때도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을 타주며 위로해 줬다. 이후에 뉴욕에서도 일정이 잠깐 겹쳤는데 당시에도 친구 관계로 마음이 힘들었는데 (타지에 나와 지내면 부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친구 관계에도 크게 흔들리게 되는 것 같다.) 가족들이랑 있다고 해서 그럼 됐다고 했더니 너도 우리 가족인데 뭔 상관이냐고 불러서 같이 밥도 먹었다.
그래서 딱 한 번 밖에 안 가봤지만-심지어 맛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그 추억 속의 Arby's를 우리 집 바로 앞에서 발견해서(심지어 코스타리카 전체에 딱 세 개 있음!) 누구에게 말은 못 하고(이 구구절절을 누구에게, 어떤 언어로 전달할 수 있을까.) 속으로 아껴뒀다가 힘든 일이 있는 날엔 꼭 한 번 와서 먹어야지! 생각만 했다. 그러다 이번 여행 내내, 그래도 뉴올리언스는 따뜻한 곳이었어.. 말도 통하고 실제로도 이렇게 춥진 않았지.. 생각하며 산호세로 돌아가면 꼭 Arby's에 가서 햄버거를 먹겠노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운동을 마치고 꽤 먼 길을 걸어 Arby's에 들어와 인스타 페이지를 보여주면서 이 프로모션 하죠? 하고 야무지게 주문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에스떼르다! 했더니 STER이라고 적힌 영수증을 주었다. 내가 ESTHER에서 H 빼는 건 이제 인정을 한다 이거야. 왜냐면 나도 이제 에스더라고 안 하고 에스떼르라고 말하고 다니니까! ESTER? 인정. 근데 어쩌다 E까지 빼먹고 STER가 됐냐.. 누구 이름이 STER냐.. 그치만 아마 내가 스떼르라고 했겠지.. 그렇게 받아온 버거와 컬리프라이는 그때 그 기억과 비슷하게 특별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맛이었지만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또 이 추억을 혼자 오래오래 뜯어먹고 살아야지. (그리고 스떼르라고 이름 쓴 사람한테 스페인어 과제 위해서 이 근처 약국 좀 알려주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