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심카드 만들기, 계좌 열기, 장보기
2024.08.14.(수)
관용 비자를 받았으니 프리패스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쉽지 않게 입국 심사를 통과했다. 자정이 넘어 공항까지 픽업 나와준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만나 숙소에 도착했다. 멕시코에서부터 감기던 눈을 드디어 붙이려나 싶었는데 꼬박 밤을 새 버렸다. 시차적응 같은 거 신경 써본 적도 없는데 새벽 내내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힘들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혼자 살게 되면 처음에 꼭 그 순간이 있는데 이번에는 잘 넘긴 것 같더니만 뒤늦게 찾아왔다. 보통은 내가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겠지?라는 생각과 숨 빠르게 쉬기 수준인데 최장 기간(예정)과 언어 안 통함의 조합이 갑자기 커져서 내가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지 빨리 짐 싸서 한국으로 가야 해! 까지 몇 번이고 다녀왔다. 그렇게 밤새 죄 없는 아빠만 괴롭히다가 잊고 있던 mocking interview 세션이 시작한다는 알람이 울렸다. 참여할 생각이 없었는데 사람 목소리를 들으면 조금 나을 것 같아서 듣기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고 들어갔다가 인터뷰 참여자분들에게 피드백까지 줘야 했다.
조각조각 정신을 다시 모아 붙여 블라인드를 치니 처음으로 보는 코스타리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밝은 해 덕분인지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들 덕분인지 혹은 이른 시간부터 조깅하고 있는 사람들 덕분인지 밤에 겪은 와글와글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밤새 배가 고파서 캐리어에 챙겨온 햇반에 커리를 먹었다. 동생이 영상 좀 찍어 올려보라고 퇴사-출국 기념으로 선물해 준 액션캠이 사라진 줄 알고 또 잠깐 패닉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이 또 한 번 똑 떨어졌지만 정신 차리고 밖으로 나가 1) 심카드 구매 2) 은행 계좌 열기 3) 장보기 미션 수행을 위해 첫 외출길에 나섰다.
방에서 캡처해 온 구글맵을 따라 15분 정도 걷는데 자꾸 횡단보도가 없는 큰 도로만 나와서 이걸 어떻게 건너가라는 건지 무작정 길을 따라 걷다가 마주친 사람들을 보니 고속도로 수준의 길을 그냥 건너고 있었다. 쭈뼛거리며 그저 서있자 운전자들이 모두 멈춰 서서 손짓으로 건너라며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Claro에서 영어와 손짓발짓을 섞어 심카드를 개통했는데 직원들이 너무 친절해서 이때까진 그냥 그 지점 직원들이 친절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서로 말이 안 통해 느리지만 하나하나 아주 꼼꼼히 알려주고 이슈 있으면 본인에게 연락하라고 번호까지 찍어줬다. 그렇게 드디어 스마트폰의 기능을 하게 된 핸드폰을 들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은행으로 향했다.
결론적으로 계좌 열기에는 실패했다. 일단 은행에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직원이 한 고객과 마주 앉으면 30분은 기본이었다. 삼엄한 경비를 지나, 은행계좌를 열기 위해 왔어요(abrir una cuenta bancaria)를 띄운 번역기를 보여주고 83번 대기표를 받았다. 한참 기다리다 스페인어로 숫자를 불렀는지 83을 지나 번호판이 84로 넘어가서 당황했지만 불쌍한 눈빛으로 계속 기회를 보다 번호표를 들고 어필했더니 기다려~를 당하고 또 한 30분을 기다렸다. 봐주는 순서도 마음대로인 것이 번호랑 상관없이 노약자석 줄에 앉아있으면 먼저 불러준다. 근데 그 노약자석이 또 핫플이다. 그렇게 약 한 시간 반 만에 직원과 대화할 수 있었다.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없다고 양해를 구하고 영어-스페인어 번역기를 켰는데 본인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스페인어 대신 영어를 천천히 읽어나가서 뒤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괜찮나? 싶었다. 또 내 여권을 받아보고는 이름을 읽어보겠다고 하나씩 천천히 발음하는데 씌익 거리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은행 안에 사람들은 그냥 모두 앉아서 허공을 보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거주증을 먼저 받아야 계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좌 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이것이 PuraVida(PureLife라는 뜻으로 코스타리카 사람들이 인사할 때, 감사할 때, 좋을 때, 이럴 때 저럴 때 범용적으로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의 라이프인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눈에 익은 월마트가 있길래 작은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점저로 먹을 치킨을 구매해 봤다. 이전 찾아본 바로는 달러를 내고 코스타리카 콜론으로 돌려받는 게 환전 국룰이라길래 도전해 봤는데 또 이걸 처리하는데 점원이 누구를 불러야 해서 아주 오래 걸렸다. 와중에 뒤에 줄 선 사람들, 다른 직원을 기다리는 점원 모두 그저 기다렸다. 집에 오는 길 가까운 곳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있어서 구경할 겸 가봤는데 건물이 아주 멋졌다. 경비 아저씨가 나오시길래 나는 그냥 구경온 사람이라는걸 또 어떻게 설명하지 당황했는데 그냥 같이 찍으라고 포즈 취하는 또 한 명의 친절한 푸라비다인이었다.
집에 돌아오고서는 아직 해도 안 졌네 스타벅스나 한 번 도전해 보자! 해놓고 갑자기 피곤해서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와중에 집 문제 때문에 또 마음이 안 좋아서 마주하고 해결하려고 현 상황에 따른 해결책을 옵션 별로 정리해서 엄마아빠랑 논의했다. 엄마랑 전화하면서 또 힘을 엄청 받고 일찍 잠들어서 밤에도 중간중간 깼지만 드디어 잠도 보충하고 이곳 시차에 맞춰 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