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이창동 2007.05.29(화) pm11:00 프리머스 해운대
우리나라의 지명 표기법이 한자 두 글자로 바뀐 것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이며(당시 중국에서 한자 두 글자로 지명을 짓는 것을 본따온 것. 다만 우리식 훈독으로 읽었을 것이라 추측),
일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한자의 음독으로 바꿔버려 실제 지명은 전혀 달랐을 것이라 여겨지지만(예를 들자면 현재 우리가 大田이라 부르고 있는 곳은 원래 한밭이라는 지명이었을 것이란...)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있던 이 지명langue(사회 관습적인 의사소통 체계로서의 언어)가 이창동감독에 의해 한 여성을 대변하는 parole(개인적·순간적·구체적·개별적인 언어)이 되었다.
이 지명에 이어 재밌는 것은 신애를 좋아하게 된 종찬의 카센터 이름이다. 서광... 서광은 불교용어로 항상 광명이 비친다는 의미이다. 신애를 위한 서광이 되는 종찬. 이창동 감독의 섬세함이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여자 신애.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애 딸린 과부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허세를 부리는 거짓말을 시작한다.
여기서 현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누가 뭘 어떻게하고 사는지 시시콜콜 물어보기 좋아하고 알고싶어하는 사회. 좋게 말하면 이웃간의 화합을 위해서, 정이 있는 사회를 위해서라지만,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부추기게 되고 그 거짓말이라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다시 거짓말이 켜켜이 쌓여 벽이 된다. 결국 벽 하나를 두고 소통을 하고 있으니 정상적인 소통이 될 리가 없다. 소통의 불협으로 아들 준이가 유괴되고 살해된다.
살해된 아들의 장례식장. 울부짖는 시어머니와는 달리 신애는 울지도, 살인범을 향해 분노하지도 못한다. 그녀를 좀먹어 갈 고통이라는 종기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곪은 부분을 스스로 터트려버리는 것이었는데, 이웃에서는 마이신(항생제)을 먹어 응어리를 남기라 한다. 하느님을 찾으라 한다.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인간들이기에 절대주체라고 할 수 있는 신에게 의존하려는 본능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에게 종교는 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완전 의존을 지향한 신애에게는 독이 되었다. 종교도 인간관계도 그러한 맥락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사랑 안에서 아들을 살해한 살인범도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니는 신애. 그러나 정작 살인범의 딸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방관한다.
그리고는 들꽃으로 꽃다발까지 만들어 살인범을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감옥으로 면회를 간다.
그러나 정작 살인범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자신이 이미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기절하고 마는 신애. 그녀는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분노한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를 해? 사람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신이 먼저 용서를 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잘못된 종교의식이 가질 폐단을 이야기 해 주고 있었다. 면죄부... 단지 신을 위한 충성을 보이기만 하면 속죄가 실체화가 되는 기독교도들에게, 속죄는 손쉬운 행동이 되어버렸다. 또한 피해 당사자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할 필요가 없으므로 사람에게 용서를 비는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다.
얼마전에 재미있는 사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같은 살인사건에 대해 중국과 미국 학생들에게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 때 중국학생들의 대부분은 만약 살인범이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반면 미국 학생들은 살인범의 내면이 변할 수가 없으니 어떠한 상황이었더라도 살해범은 살해를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양적 유교와 서양적 기독교의 차이점이다. 최근에는 서양 쪽에서도 동양적 사고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근간은 항상 선악의 대비이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악. 그 기본은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가 항상 저변에 깔려있다.
신애는 신의 용서에 항거한다. 신의 사자를 자처하는 장로를 유혹하기도 하고, 신성한 집회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고 급기야는 가장 큰 죄라 치부되는 자살을 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자살에 실패하고 병원에서 퇴원해 나온 신애는 머리를 다듬기 위해 미용실을 찾는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를 잘라주러 나타난 것은 살인범의 딸이다.
처음에 그녀는 잠자코 머리를 맡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이구 결국 이 영화도 별 수 없구나. 이 앞전에 자살을 꾀하고도 결국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신애와 겹쳐지면서 신의 용서의 미학으로 끝을 맺겠구나 했다.
그러나 머리를 반만 자른 신애가 갑자기 화를 내며 발딱 일어나 나가버린다. 그녀는 결국 잘려진 머리 반쪽만큼 용서를 한 것일까...?
그리고는 나머지 머리 반은 스스로 자른다. 그때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종찬이 거울을 가져다 주고 볕이 들고 있는 마당을 비춘다.
사람의 용서다.. 신의 용서도 비밀스럽게 비추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삶은 지속된다...
https://tv.kakao.com/v/8934137
사족: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전도연 씨가 아니라 송강호 씨라고 생각했었다. 전도연 씨가 역을 연기했다면 송강호 씨는 그 역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배우들을 위해 절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송강호 식 연기 스타일이다.
연기에 따라 얼굴도 달라진다. 박찬욱 감독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친절한 금자씨'를 보고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다 본 것이 '박쥐'. 내용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박쥐'에서 송강호 씨를 보고 섹시함을 느끼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는 '기생충'으로 명실공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기자가 됐고 그의 연기에 대한 가치가 알려져 기쁜 1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