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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림 ComfyForest Aug 25. 2021

소시민의 소소한 소회(4)

마더... 인간의 집착이 어떻게 잘못된 것들을 정당화 시키는지

봉준호 감독은 전작 '살인의 추억'과 '괴물'로 알게 된 감독이다. 그 치밀한 구성력과 한국사회 특유의 문제점을 콕 찝어서는 무겁지 않게, 유머러스하게까지 느끼게 만드는 표현력에 반했었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보다 오히려 '마더'가 개봉하길 손꼽아 기다렸었다.


'엄마'나 '어머니'가 아니다. '마더'다. 우리네 말로 '엄마'나  '어머니'라 제목지어졌다면 영화를 다 보고 돌 던진 관객들이 꽤 있었으리라. 모독이라고.


다행히 딴나라 말로 하다보니 그러한 괴리감이 줄어든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단 첫장면에서 엉망으로 헝클어진 모습을 한 혜자(마더)가 멈춰서 있다 흔들흔들 꺼떡꺼떡 춤을 추기 시작한다. 눈동자엔 촛점이 없다. 정말 말그대로 넋이 나간 미친X같은 모습으로 마른 풀들을 따라 흔들거리며 춤을 춘다.


실제 김혜자 씨를 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이 첫장면에서 거짓말 안 보태고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김혜자씨의 표정과 몸짓에서 전율을 느꼈다.  아, 이 사람은 내가 알던 김혜자씨가 아니구나. 하고


1. 엄마와 여자?





영화는 조금 모자란 듯한 아들과 그 아들을 세상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는 마더(어머니)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아들은 그 마더(모성애)를, 모든 과보호와 애정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고, 때로는 귀챦다는 듯 밀쳐내기까지 한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민망하다. 아들은 마치 자신에게 들러붙어있는 여.자.를 대하듯 마더를 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 영화 안에서 봉감독은 마더와 여자와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표현하고 있다. 아들 도준에게 '정력은 뒀다 뭐하게?' '잘 여자나 있어? 그랬단 봐.'라고 하는 대사들과 그 표정에서는 홀어머니가 남편을 대신해 아들을 대하는 애정, 외디푸스적 경향이 드러난다.


또한 진태와 맨하탄 딸과의 정사장면을 숨어서 지켜보는 혜자의 시선이나 고물상 노인이 '자고 가도 좋고.'하는 대사에서 역시 여자로서의 마더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은 다르다. 살해당한 아정의 친구가 도망가기 위한 구실로 혜자에게 생리대를 사다 달라고 한다. 혜자가 근처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가져다 계산대 위에 올려놓자 점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생리대와 혜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마더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장면이다.


한국 사회에 흔히 보이는 오류이다. 모두들 마더는 엄마로 있기를 바란다. 아니 강요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껄끄러웠던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그러한 문제점을 봉감독은 군더더기없이 표현해 내고 있었다. 그때문에 아마 이 영화가 40대이상의 여성들에게서 의외의 평점을 뽑아낸 듯 하다.(Daum의 영화 평점 참조. 평균 평점 7.8인데 40대 이상 여성들의 평점이 가장 높은 8.3을 주고있다. 흥미로운 현상이다.)



2. 너 엄마 없니?




  

마더는 형사들이 얼토당토 않은 수사방식으로 아들을 살인범으로 몰자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맹신 하에 진범찾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고물상 노인은 진범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 범인임을 알려주는 증인이었다. 진리와도 같았던 맹신이 깨뜨려지자 마더는 범인찾기에 쏟았던 모든 광기를 노인에게 쏟아 그를 때려 죽인다.


고물상에 불을 놓는 것으로 급하게 뒷수습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마더. 그 앞에 형사 제문이 나타난다. 모든 것이 들통났다 여긴 마더. 그러나 제문의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나온다. '진범이 잡혔다'라는


마더는 출소하는 아들이 아니라 진범이라는 종팔을 허위허위 찾아간다. 그리고는 엄마가 있는지 물어보고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오열한다. 도준과 겹치는 종팔의 모습에서 만약 종팔에게 엄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회한의 눈물이리라. 또한 아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또 두 사람이나 되는 희생양을 내어버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비통의 눈물이기도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더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 이쯤에서 나올 법한 죄를 자신이 받겠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마더의 죄책감을 덜어준 것이 바로 형사들과 변호사일것이다. 진범이든 아니든, 누군가가 되면 된다 식의 안하무인 격 수사를 진행하는 형사들이나, 불리한 건은 맡지 않으려는,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 적당히 합의해 자신의 이익만을 채우려는 국선변호사. 이들도 이러는데 내가 왜? 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게다가 마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잊는 망각의 침을 스스로에게 놓는다. 사실 마더의 반전은 도준이 진범이라는 데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 여겨진다. 진실이나 정의보다 아들을 택하는 마더의 모습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관객들은 전율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꼈으리라.  



3. 저주받은 관자놀이? 마더의 흥미로운 의문점들






도준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있다보면 잊었던 사실들을 상기해 낸다고 했다. 덜떨어진 도준이 잊었던 것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덕분에 고물상 노인의 얼굴도 기억해 냈다. 그런데 마더는 왜 '저주받은 관자놀이'라 부르는가?


답은 곧 나왔다. 도준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있다가 변호사를 데리고 면회 온 마더에게 말한다. '5살 때 농약넣은 박카스 먹여서 죽이려 했쟎아.'


여기서 관객들은 도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사실은 정상, 아니 그 이상으로 천재에 가까운 인물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도준의 마더에 대한 20년에 걸친 복수극은 아닐까 하고.


뭐, 사실 도준이 정상이든 정상 이상인 천재든 어쨌든 도준이 단순히 덜떨어진 아이는 아니란 사실을 마더는 알고 있었다. 알지 못했다면 '저주'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으리라. 왜냐면 그 기억은 도준에게가 아니라 마더를 향한 원망이기에 저주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 침맞자며 도준에게 달려드는 마더의 모습으로 보아 어쩌면 수시로 도준에게 '망각'을 강요했을지도 모른다.


살인 전, 살인 후, 그리고 출소 이후 도준의 행동을 눈여겨 봐야한다. 살인을 하기 전 도준은 덜 자란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아정을 죽인 후 돌아와 마더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이 든다. 외디푸스적인 경향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살인 후 교도소에 갇히고서는 덜떨어진 모습과 정상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교도소에 갇힘으로써 여자(마더)의 정복(살해)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소 이후를 보면 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잠자리에서는 마더에게 등을 돌린다. 그것은 그가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마더에게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5살 때 겪었던 끔찍한 기억때문에 그는 그동안 죽지않기 위해 스스로 마더의 소유물로써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한국 사회의 부모 자식 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연히 아정을 살인(여자를 정복)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더이상 마더의 소유물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원빈은 김혜자씨만큼 완벽하게라고 말할 순 없지만 자신의 장점(눈빛)을 잘 살려 표현해 내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즈음 마더에게 불에 탄 침통을 건네는 장면에서 표정과 말투는 그가 단순 미청년 캐릭에서는 벗어났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마더에서 또하나의 의문점은 진태라는 캐릭터다. 당췌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도준에게 의미가 있는 캐릭터인지, 마더에게 의미가 있는 캐릭터인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더 놀라운 것은 이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캐릭을 진구라는 배우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잘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구씨에게 물어보고싶다. 대체 이 캐릭터는 뭡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해 내고 있죠? 하고 말이다.


진구라는 배우는 영화 '기담'을 보고 눈도장을 찍어 둔 배우다. 연기력만으로 얼굴까지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몇 안되는 배우 중 하나라 여겨진다. 앞으로 좋은 작품을 만나 그의 재능을 꽃피웠으면 좋겠다.


4. 라스트





마더는 모든 나쁜 것을 잊게 해 주는 침자리에 스스로 침을 놓고 관광버스 안에서 다른 마더들과 미친 듯이 춤을 춘다. 그 마지막 장면은 내게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연상하게 했다. 검은 실루엣으로만 나타난 춤을 추는 마더들. 내게는 왜 그네들이 비명을 지르는 듯 느껴진 것일까.


아마도 나 역시 내가 교육받은, 한국 사회에서 강요하는 마더의 상을, 마더의 잣대로 그네들을 보아버렸기 떄문은 아닐까...


마더는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부모와 자식관계의 문제점들,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난 부수적인 사회 병폐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싶은 것만을 보려하는 인간의 집착이 어떻게 잘못된 것들을 정당화시키는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더

이병우씨가 맡은 영화음악 '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내 생전 영화보다 음악감독 이름 확인하기도 처음이다. 결국 극장에 혼자 앉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며 마지막까지 듣고 있었다.


드라마 '마왕'의 팬들은 알겠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왈츠처럼 그 제목은 왈츠이지만 곡은 비장하고 장엄하다. 마더의 '춤'은 심장에 호소하는 듯한 비트로 시작되어 우울함과 비장함을 들려주는가 하더니 이번에는 남국의 음악과도 같은 취한 듯 감미로운 음색이 떠돈다. 그러나 감미로움 안에 다시 인간의 무기력함을 넣은 듯한, 그야말로 한국 어머니들의 '한'을 나타내는 듯한 음악이다.  


그야말로 마더와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음악. 이 음악만으로도 마더는 절반 이상 성공했다 여겨진다.



https://youtu.be/qX2YWJeH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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