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유산 주소 및 위치: (48479)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번영로9번길 9 일원
https://goo.gl/maps/FNa552nRjbKbe2Hw9
소막마을? 처음에는 소막이 무슨 뜻이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을이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곳이라 생각했지 설마 소들이 지내던 막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답니다. 소막이 '소를 키우는 막사'를 의미한다는 것을 검색을 해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한자어로 '우사(牛舍)'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요.
한국 전쟁 때 부산까지 쫓기듯 내려온 피난민들이 지낼 곳이 부족하자 바로 이 소를 키우는 막사에서 지냈던 것입니다. 불과 70여 년 전에 말이지요. 1909년 17,000평 되는 부지에 우사 5동(600마리 수용)을 건설,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총 14동의 우사를 신설ㆍ증축했으며 1919년도에 전반적인 시설을 다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 대대적인 우사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바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이곳에 한국의 소를 수탈하기 위해 우역(牛疫) 검사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전국 각지의 소를 모아 소막에서 소들을 관리하고 검사한 후, 이상이 없는 소들은 만주나 일본으로 수출하고 결함이 있거나 병든 소들은 검역소에 있던 화장터에서 태워 버렸던 것입니다. 총 14동의 우사에는 약 1700마리의 소들이 관리되고 있었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암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우암(牛巖)', 즉 소를 닮은 바위 모양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우암동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40년 동래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편찬한 동래부의 지리지 『동래부지』에서 '남촌면 하단 우암리'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 모양을 닮은 바위는 1894년경까지도 우암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후 1930년대 우암동과 감만동에 해당하는 적기만 매축 공사로 인해 우암동의 상징인 소 모양의 바위는 사라지고, 우암포의 지형도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은 한일 양국의 표류민 지정 접수처가 됩니다. 즉은 말과 소만 있던 이곳에 일본에서 귀국해도 돌아갈 곳이 마땅찮았던 귀환동포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작은 마을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 이후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은 오갈 곳이 없어 소막마을까지 오게 되는데요. 피란민들은 소막마을에 몰려들어 천막이나 판잣집을 지었고, 이로도 부족해 소 막사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이 마을을 '소막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소 막사 한 칸의 규격은 폭 2.5m, 길이 4m로, 당시 피난민들은 이 칸에 나무판을 덧대 임시로 벽을 만들어 지냈습니다. 전쟁 이후 시간이 흐르고, 나무판을 시멘트 벽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는데요.
우암동 소막마을의 골목은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좁은 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아직도 예전 소 막사의 지붕 모습과 환기구로 쓰이던 작은 창도 볼 수 있습니다.
소막마을의 이러한 주택들은 피란 시기 주거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 2018년 5월 8일 등록문화재 제715호로 등재되었습니다.
피란시절, 밀려 내려온 피난민들이 주거 시설이 부족해 소 막사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을 보여주는 곳, 그 자체만으로도 소막 마을을 찾아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