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유산 주소 및 위치: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2가 231-178 일원
https://goo.gl/maps/X3NmtutrkLd84y4k6
비석 마을? 설마 그 비석이 진짜 그 비석은 아니겠죠? 생각하시는 그 비석(碑石)이 맞습니다.
개항 이후 부산에는 중구 광복동에 위치한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근처에 있던 북병산 쪽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만들어집니다. 1906년, 북항을 매축이 시작되어 북병산에서 흙을 채굴하게 되면서 공동묘지를 현재 위치한 아미산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또 그로부터 3년 뒤인 1909년에는 아미동에 화장장도 생깁니다. 일제강점기에 아미동은 산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닌, 죽은 사람들의 안식처였던 것입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대통령까지 내려와 임시 수도가 된 부산에 피난민들이 물밀듯 밀려옵니다. 주거지가 부족해 소를 키우는 막사 안까지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됐는데도 여전히 주거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때 오갈 곳 없던 피난민들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아미동에 있던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습니다.
당장 지낼 곳을 마련해야 했던 피난민들은 급한 대로 묘지에 있던 비석과 상석을 재료로 집을 지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미동 비석마을에는 아직까지도 계단이나 담장에 당시 피난민들이 주거지를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비석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이곳은 '비석마을'로 불리게 됩니다.
또, 공동묘지라지만 그렇게 넓지 않았던 산비탈에 많은 피난민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암동 소막마을처럼 주택 간의 간격이 매우 좁은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덕분에 이 여름에 어울리는 도시괴담 등을 모아놓는 사이트들에는 아미동 비석마을과 관련된 괴담들이 꼭 보입니다. 비석이었던 돌을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痛い、痛い(아파, 아파)!" 하는 소리가 들렸다거나, 유골함이었던 단지를 항아리로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熱い、熱い(뜨거워, 뜨거워)!" 하는 소리가 들렸다거나, 유골함 안에서 손이 나왔다, 세탁소 지하에서 자고 있는데 下駄(일본 나막신) 소리가 들리더라,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 등등.
그리고 그 괴담들에도 덧붙여져 있듯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당장 오갈 데 없이 얼어 죽을 지경이었기에 귀신이든 뭐든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공포였으니까요. 이후에는 오히려 산 사람이 살기 위해 안식처를 뺏긴 망자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석 앞에 수시로 물과 밥을 놓아 영혼을 위로해주며, 명절에도 차례를 같이 지내준다고 합니다. 음력 7월 15일 백중에는 인근 절에서 일본인 위령제도 지내준다고 하네요.
아무리 적이었다고 해도 여기 묻힌 사람들은 모두 제사도 못 받게 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타국에서 힘들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인한 동병상련이 더해진 듯합니다.
이런 사연으로 부산 향토사학자, 종교계 등 민간 차원에서 망자의 후손을 찾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가 2019년부터는 부산 서구청에서도 직접 비석의 전수조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미동 비석마을은 귀신보다 당장 눈앞의 현실이 더 무서웠던 피난민들의 생활 모습과 전쟁 중의 주거 양상이 잘 보존된, 역사적·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022년 1월 5일 바로 올해 1월에 등록 문화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