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360 입상작_에세이 우수상
할아버지와 콜라
<브런치에 첫 글을 씁니다. 이전에 입상했을 작품이지만 부족한 글, 퇴고를 한 번 더 감행했습니다. 오디오북 에피소드를 만드시는 바림소리님과 협업했던 영상도 링크 남깁니다.>
이 이야기는 집안 공식행사인 명절, 제사 때나 볼 수 있는 할머니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뽀글뽀글한 머리의 웃음기 없는 사진, 한쪽 귀퉁이가 소실된 옛 앨범을 찾아봐도 옷과 얼굴의 주름을 제외하고는 모습이 거의가 비슷하다.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을 모두 겪은 할머니는 무뚝뚝한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다. 뭔가 말하려는 것 같은 묘함을 느낀다.
이때, 발견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옛 동네 집 앞에 모여 앉아있는 노인과 할머니의 사진이다. 그때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밥때가 아니면 지정된 장소에 모여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사진에 나와 있는 꽈배기처럼 생긴 지팡이에 머리를 기댄 윤 씨 할아버지, 그 옆에서의 밝게 할머니 모습이 색다르게 보인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었다. 특히 그곳에서는 맑은 날에도 자욱한 연기가 갑자기 흩날리고 매캐한 냄새가 날아올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후에 그곳이 대학가 근처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집 주소를 알지 않아도 되는 어린 나이여서 뭣 모르고 동네를 활보하고 다녔을 무렵이었다. 그날도 그랬었다. 그런 날이면 화난 얼굴을 한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멀리까지 데려가 지거나 찾으러 나오신 어머니에게 인도되었다.
“윤 씨 아저씨, 고맙습니다.”
그 근처에서 상회를 하고 있던 그에게 몇 번을 끌려갔던 기억이 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집안도 좋고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는데... 다음에 길에서 아저씨 보면 꼭 인사드려.”
그때마다 알았다고는 했지만, 몸집이 작았던 나는 커다란 아저씨에게 끌려갈 때마다 공포심을 느꼈던 것 같아, 마주칠 때면 다른 길로 피하거나 딴청을 부렸었다. 심지어 심부름하러 갈 때는 몇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는 곳에 가서 물건을 사기도 했다. 잘못 사가서 혼난 적도 많았었다.
삼촌이 결혼하게 되었다. 할머니와 같이 살던 삼촌이 분가하면서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던 우리는 얼마가 지나서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윤 씨 아저씨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고, 점점 잊혀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는 머리가 굵어졌고, 욕망을 채울 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 나이 또래 애들은 이것저것 용돈벌이를 했었다. 나 역시 친구들과 신문배달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짧은 시일에 다섯 명의 친구들 가운데 나 하나만 남게 되었었다.
매일 새벽 3시가 되면 꼬박꼬박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급소로 향한 나는 힘들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없는 거리에서 새벽 공기를 독식하게 된 것을 좋아하게 됐다. 으레, 경쟁에서 이긴 것 같은 쾌감도 들었다. 뭐, 돈이라는 자본주의의 산물이 없었다면 제일 먼저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담이지만 받은 월급은 일주일도 채 안 되어 탕진하기 일쑤였고, 상고머리의 내가 학업과 멀어진 계기이기도 했다. 자리에 앉으면 졸기 바쁜 학생에게 내려지는 가혹한 체벌, 하지만 체벌보다 무서웠던 건 중학교 2학년생의 숫자가 없으면 신경 따위는 쓰지도 않아도 되던 꼬리표였다. 그때마다 관둬야지 하면서도 성적표를 받아든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엄한 아버지에게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성적에 대한 질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 나이에 할 수 있었던 걱정거리들로 짙어지고 있었다. 어둠이 온 동네를 덮어도 그리 쌀쌀하지 않았던, 그날도 나는 울리는 시계의 알람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철문 밖을 나올 때 기우뚱한 자세로 달그락거리는 구르마를 끌어내고 있었다. 집 앞에는 오후의 볕을 피해 모이는 노인들의 지정석이 보였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보급소를 가려는 나는 성적이라는 모든 학생들이 떠안고 있을 걱정을 제외하고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달그락달그락 구르마에 연결된 이음 철제가 힘차게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응원의 박수가 활기차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가 그날에도 경쾌하게 들렸다.
전봇대가 어울리지 않게 박혀있는 길게 이어져 있는 골목을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난 생각이라는 그물에 빠져 있었다. 겁이 많았던 난 그 길을 지나갈 때면 으레 딴생각하면서 교회가 있는 마지막 전봇대까지 가곤 했다. 일 년 가까이 가던 길이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다랐을 때 스치듯 스며든 시야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등줄기가 오싹해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르마를 끌었다. 교회를 막 지나면 보이는 낡은 것이 친숙해 보였던 ‘아늘슈퍼’, 원래는 ‘하늘슈퍼’였던 곳 아래쪽 길이 대로변으로 통하는 초입이다. 내리막을 가려던 찰나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소리가 발목을 부여잡았다.
“어여이! 어여이!”
순간,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달아올랐고, 난 무엇에 이끌렸는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심장은 쿵쾅거려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때, 오토바이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나의 호기심은 극에 달해 내리막이 오르막으로 변하는 체험을 해야 했다. 오르는 짧았던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고, 발목에는 잘 익은 메주를 매단 것 같이 불쾌했다.
다시 올라가 교회 근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밤에도 낮처럼 주위를 밝히던 그곳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맞은편에는 골목이 많았다. 아늘슈퍼와 구멍가게라 불리던 곳에 이 길의 처음과 끝이 있다. 골목 사이사이 길들은 새벽에는 초입만 보일 뿐 너무 어두워 얼씬도 하지 않던 곳들이다.
골목들을 살피기 시작했던 나는 무엇인가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나와는 다르게 긴 바지와 점퍼를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조금 용기를 내서 가까이 다가간 내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그의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은 심하게 흔들렸다. 날 발견한 할아버지는 거친 숨소리가 섞인 말들을 해댔다.
“어여!...”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그는 만성이 되어버린 우리 할머니가 앓고 있는 당뇨병 증세와 매우 흡사했다. 평소에는 아슬아슬하게 걷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심하게 몸이 떨려 도움 없이는 거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른이 집에 없는 날이면 형제들과 교대로 부축을 했었다.
난 몸이 왜소한 할아버지를 구르마에 앉혔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소용없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아니, 오히려 할아버지가 구르마를 먼저 잡았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금세 뒤집히곤 했다. 하는 수 없이 난 할아버지를 업기로 했다. 이제 방해만 되는 구르마를 교회 안쪽에 놓고 나왔다.
이미 다른 생각으로 꽉 채운 나는 업기 전에 할아버지를 부축도 해보고 들어도 봤으나 본의 아니게 둘 다 땅바닥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자연스레 등위에 올라온 할아버지는 흔들리는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로, 저쪽으로.”
다급함에 발을 옮기던 나는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갔을까, 온몸은 나의 땀과 할아버지가 흘리는 침으로 범벅이가 되었다.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녹슨 철문이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나는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풀렸는지 안도감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상한 기운이 몰려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강아지 한 마리가 지나다니며 발 사이를 간지럽혔다. 놀라기도 잠시 나는 할아버지의 체중이 느껴지자 또다시 열이 오르고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서둘러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흔들리는 몸으로 걷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들어와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에 홀린 듯 멍하니 서 있던 나는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 나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서 있었지만, 어느새 거실 안쪽으로 들어간 할아버지는 줄 게 있다고 하셨다. 기다리는 줄곧 내가 자리에 있는지 확인을 하셨다. 알아듣기도 힘든 말로 대꾸를 원하는지 알 수 없는 혼잣말도 섞어가며 말이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집기, 방금 벗어놓은 고무신 그 옆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밟고 있는 슬리퍼가 보였다. 서 있기 불편해진 나는 신발들을 옆으로 밀어두고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는 문을 보며 앉았다. 꼬리가 유리문에 부딪혀 소리를 내는 강아지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주위가 더 밝아지는 동시에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와도 된다고 들어오라고 말하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못 이기는 척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내가 몇 걸음 가니, 다가오던 할아버지는 내 손에다 들고 온 플라스틱 잔을 쥐여주었다. 컵 안쪽에는 씻기지 않은 검은 자국이 보였다. 이윽고 철제로 된 상 위에 놓여 있던 콜라를 들고 할아버지가 내 컵에 따르기 시작하였다. 순간 다소곳해진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시선을 느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받아 마셨다. 목이 마르기도 했었던 나는 별생각 없이 콜라를 더 받게 되었다. 사실 탄산을 많이 좋아하기도 했던 탓도 있었다.
“응 고맙구려. 더 있으니까 마시면서 쉬어.”
하면서 할아버지의 말들이 이어졌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어떨 때는 빨라졌다가도 느려지며 쉼 없이 뱉어댔다.
젊었을 적 공부를 잘해서 일류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 일을 시작했었다가 결혼 후에 자식들 뒷바라지를 잘해 모두 잘 되었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그 당시 나는 그런 얘기들이 고문에 가까웠다. 적어도 그날에는 더욱 그랬다. 이만 가보겠다고 몇 차례 말을 건네 보았지만, 그때마다 콜라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이것저것 가져다 보여주셨다.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모님께 잘해야 한다. 그때마다 “네”라고 반복할 뿐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마침, 할아버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티브이를 켜시더니 뒤쪽에 손을 뻗어 주섬주섬 바가지를 꺼내와 밖으로 나가셨다. 이때다 싶어 플라스틱 컵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어느새 쪼그려 앉아 강아지에게 밥을 주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벌써 가느냐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난 도망치듯 대충 인사하고 철물을 빠져나왔다. 더 있으면 다시 고문이 시작될 것 같았다. 보급소 일은 할당된 부분만 학교 가기 전에만 하면 되었다. 잃어버린 쪽잠만을 아쉬워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콜라 할아버지가 윤 씨 아저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돌봐주는 사람이 가끔 들린다고 했다. 자세한 내막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없었다. 매번 내게 했던 말들을 했었다고 한다.
왠지 모를 외로움을 느꼈던 나는 배달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윤 씨 할아버지 집에 신문을 던져놓고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개 짖는 소리와 철문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곤 했다.
어느 날에는 철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에게 붙잡혀 콜라를 대접받아야 했고, 그 대가로 이전에 했던 것과 같은 얘기를 또다시 들려주곤 했다. 역시나 그때의 불편함은 친숙해질 수는 없었다.
일 년이 지나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우리는 더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때 또다시 윤 씨 할아버지는 내 기억 저편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시절을 추억하면 왜 이리 추었던 기억만이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해 겨울들도 지금처럼 짧았던 겨울이었는데 말이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그저 말을 하고 싶었던 상대가 필요했었던 거 같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어느 땐가는 17년 지기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추억에 젖어 있지 말자. 난 낡은 것은 앞으로 쳐다보지 않겠다. 그때는 그저 원래 그런 것이니 하고 넘겼던 수많은 일이 같은 길을 다른 방식으로 걷고 있는 현실로 다가와 있음을 느낀다.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었다.
현재를 살면서 성장통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의 일만을 생각했던 시절을 지나 뒤돌아보고 또 추억할 것이다. 어쩌면 겨울을 지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커져 있기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강아지의 밥을 주던 할아버지. 모르는 동네 아이에게 주었던 콜라에 채워진 이야기들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때 콜라는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