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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Mar 17. 2023

영광스럽지 못한 영광을 말하다.

 <더 글로리> 리뷰, 2023, 한국, 안길호


용서받지 못할 학폭(학교폭력)이다. '더 글로리'를 보기 시작하며 중간에 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런 연출과 극본, 연기를 했을까. "엄마는 내가 누구를 죽도록 때리면 가슴 아플 거 같아 죽도록 맞고 오면 가슴 아플 거 같아?"라는 딸의 한마디에 충격받아 글을 쓰게 됐단다.


권선징악, 인과응보는 아니어도 사회는 늘 우리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벌주고 싶었다는 말에 작가의 집필 의도가 있었다. 가슴 떨리고 주먹 쥐어지고 화가 오르락 거리지만 현실에서 일어났던 학폭을 되갚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요즘에야 SNS로 일방적 가해를 하는 격이지만 어디 이걸로 갈음이나 될까. 마지 기다렸다는 듯 폭로나 떠벌리는 걸 다 믿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작가의 상상의 나래는 어디까지일까. 순간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잘 짜인 촘촘한 그물 같은 구조 속에 탄탄한 스토리가 연결되었다. 살면서 저렇게 벌 받게 하고 죄를 돌려고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니. 보면서 치 떨리는 분노도 계획된 복수 안에 차곡차곡 저장해 가며 벌주고 싶은 마음이 잘 이행되고 있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고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물론 생사 여부를 모두 계획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에 맞는 답들을 얻어 갔다고 할까. 살면서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꽃 같은 향기가 있으며 선함과 귀함을 모두 갖고 있다. 반대로 악함과 이기적이고 악취와 천함을 갖기도 한다. 사람이 그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걸 믿을 만큼 선함보다 더 드러날 때가 있다. 때론 상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나 근본은 모두 선함과 악함을 갖고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던 가요도 있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죄의식도 없고 배려나 타인을 향한 미안함, 두려움조차 없을 수 있다니 사람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깊은 카타르시스와 해방감, 상쾌함을 넘어 인과응보는 당연하고 꼭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불러온 결과일까.


처절한 삶에 대한 복수극, 결국 일방통행이 아닌 상호 관계에 의한 거래 같은 삶이라니. 차근차근 밟아가는 계획 속에 계산된 수많은 변수와 심리, 상황, 전개, 사람에 대한 신뢰 등 믿지 못할 게 사람이었다. 하나 반대의 경우도 반드시 존재하는 양면성도 보여주어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세상엔 기댈 수 있는 어른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인물들의 지위와 가진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때론 어떤 권력도 쓰임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돈의 사용 또한 여러 방면으로 드러났다. 쓰기 위해 벌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갖고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른 사용처를 찾아가야 한다고 알려준다.


섬뜩하게 공포스럽고 무섭고 화나는 영화는 선호하지 않고 보지 않는다. 공포감도 불러오는 화도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사이비 교주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고발에 관한 내용이라 충격적이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라 한다. 문득 드는 생각은 다큐와 스토리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받아들이기엔 참담하고 모르기엔 끔찍하며 알고 싶지 않은 팩트로 둘려진 사실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 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빗방울 떨어지는 시야에 묻혀버린 뿌연 하늘처럼 그렇게 바라보는 날씨와 눈길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 삶은 어떤 모습과 색깔로 칠할 수 있는 것일까?


'더 글로리'는 아침에 피는 나팔꽃처럼 피고 지는 꽃과 같은 영광을 드러낸다. 어떤 영광을 말하고 싶었을까. 한낱 피고 지는 수많은 꽃처럼 이름 없는 존재라도 허투루 하지 말라는 경고였을까. 아님 누구나 꽃처럼 피고 지는 시기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일까. 아침나절 피었다 저녁에 사그라드는 나팔꽃 같은 인생에 누군가는 피어나고 지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처럼 영광은 사그라드는 것이니 영원할 순 없으니까. 순간의 기쁨과 추함을 갖추니 본질은 변하지 않으나 영광은 한낱 부끄러움이요 없어질 현실이었다.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킬 만큼 큰 소동이 일어나고 누가 누구를 벌주는, 현실에선 일어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뭔가 모를 쾌감도 갖추었다. 내 삶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난 누군가에게 방관자며 피해자며 가해자는 아니었을지. 순간 나도 자유로울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부끄러워진다. 우린 늘 남과 같이 사회에 어울려 지내나 때로는 고발자요 도움의 손길을 뻗기보단 내게 닥칠 위협과 피해를 떠올리는 비겁자다.


아무도 말하지 못했으나 결국엔 침묵하면 제2, 제3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땐 어렸지만 지금은 그곳을 빠져나와 내 삶을 살라한다. 결국 치유도 나아가는 인생도 다 삶 속에 있다고 속삭인다. 지금 현실에 마주하는 벽이 있다면 지나갈 것이라고, 이겨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자리가 아니라 저 높은 곳이라 말하고 다. 아쉬운 점 보단 감탄을 불러 올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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