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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말의 온도

때로는 차갑고 뜨거운 나만의 언어로

by 최림



읽던 책을 들고서 도서관에 간다. 남들이 책 읽는 공간으로 들어가 앉아 책장을 펼치고 넘겨본다. 유독 요즘 말에 대한 글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어떤 언어로 글을 쓰고 말을 하는지 보고 있다. 남을 살리기도, 힘을 북돋워 줄 수도 있는 그런 말. 내 속에 들어있는 언어를 끄집어내서 슬며시 뱉어본다. 그런 말의 파편들이 내게는 어떻게 다가오고 남에게 어떻게 전해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순간순간 말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모든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에 살면서 배운다. 남의 어려운 상황 앞에 내 위로의 말이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떤 때는 말을 하고 싶으나 할 수 없을 때도 있으며 내 말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상처가 될 때도 있다. 그럴 땐 차라리 입을 닫고 귀를 열어야 한다.



지난번 나도 그랬다. 위로라고 건넨 말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며 껄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계속 입속에 말이 맴돌았고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나의 이기심이 상대의 맘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먼저 사과를 했다.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고. 그러나 넓고 큰마음으로 괜찮다고 하는 말에 반했다. 사실 내가 더 미안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의 그릇이 있다. 물론 말의 그릇도 다르다. 어떤 온도로 주고받았는지가 중요함을 알았다. 내가 건네는 뾰족함을 아프지 않게 돌려주었기에 됨됨이가 다름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더불어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일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에 닿았으니까. 나는 그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에 닿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은 아닐 터. 내가 그에게, 그리고 그의 마음이 내게로 왔다. 인연이라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같이 오는 것이라 한다. 지나온 시간을 모두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꺼내는 말속에 지난 시간이 들어있고, 지금이 보이며 그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언어의 유희 일 수도 있고 말의 장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깊은 울림과 사색을 통해 우리의 시간이 지나고 있음이다. 말은 좁은 공간에 있을 때 더 파장이 크다. 잔잔한 호수에 퍼지는 물파장처럼 오래 더 깊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안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속도로 꺼내도 괜찮다.



위로는 상대를 '안다'는 바탕 위에 피는 꽃이다. 그러나 나의 성급한 마음과 생각으로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고 나의 마음은 불편했다. 차라리 입을 닫을 걸 하며 후회를 해보았지만 이미 건네진 내 말은 주워 담지 못했음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깊은 아량과 이해심으로 나를 달랬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부끄러울 수밖에. 내 마음이 온전히 드러났다. 때로는 침묵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의 상황과 현재의 여건을 모두 알거나 이해할 수도 없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대를 안다는 편견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우리는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파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상처를 겪어 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힘듦을.



우리는 늘 다른 이의 틈을 본다. 때로는 내 커다란 허물보다 상대의 작은 상처가 더 크게 다가옴이다. 지나고 나면 내가 가진 상처가 더 힘들게 다가오기 때문일 수 있다. 지내보기 전에는 모른다. 우리는 늘 그런 우를 범한다. 늘 내가 가진 상처가 더 클 거라는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갖기에. 오늘도 그랬다. 내 허물보다 상대의 틈이 커 보였다. 그래서 나는 지적질을 하고 속을 후벼 팠나 보다. 늘 아픈 것은 나고 아픔을 주는 것도 나였는데 몰랐다. 내가 아픈 것만 보였다. 그럴 수밖에. 그러니 상대가 보이지 않았지.



언어는 듣기를 말하기보다 많이 하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말이 앞선다. 생각보다 먼저 나가고 행동보다 먼저 나간다. 그러니 늘 실수를 하고 말을 하고선 후회를 한다. 왜 그랬지? 하지 말걸 하고.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우리는 늘 나 자신에게는 넉넉하고 남에게는 쫀쫀했음이다. 넓고 큰 아량으로 품어줄 수 없었을까? 좀 더 나이에 맞게 행동하고 여유를 가질 수는 없었을까?



품어주는 것은 내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비워내고 덜어내는 것은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들어차고 꽉 채워진 속에 다름이 들어갈 공간은 없다. 우린 덜어내고 내려놓고 나눠주어야 한다. 내 마음을, 내 것을, 그리고 내 감정까지도. 내 것을 주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진행해야 한다.



오늘 마저 읽고 곱씹으며 내 언어의 온도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그리고 적어 내려가고 내 생각의 씨앗들을 뿌려보고 싶어졌다. 이 밤 나는 내 온도를 어떻게 구성하고 채워야 할지 고민한다. 내 기준의 언어의 온도로, 차갑거나 뜨거운 나만의 온도로 채워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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