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혼자서 떠나본다. 어제 미리 인터넷 티켓팅 발권을 해놓고 아침에 입을 옷을 찾아놨다. 가방에 읽고 싶은 책 두 권, 노트북, 수첩을 넣고 옷은 편한 옷으로 두어 벌 챙겼다. 어슴푸레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알람이 울리기 전 벌써 눈이 떠졌다. 마치 소풍 전날처럼 잠이 오지 않았음이다. 그러면 어떠랴. 즐거운 마음으로 씻고 간단한 화장을 하고선 집을 나선다. 아직 출근 전인 남편은 잘 갔다 오라면서, 투정 아닌 투정을 한다. 씩 한번 웃어주고 지하철을 탄다. 새벽 어스름한 빛에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있다. 이런 시국에도 비행기는 만석이고 공항은 활기로 넘친다. 푸른 제주의 하늘을 도착하기 전 비행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땅의 모습이 좋다. 나도 저런 곳에서 아옹다옹 살고 있는데 하며.
역시 제주는 도착하자마자 공항의 야자수가 반긴다. 렌터카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린다. 간단한 수속을 하고 전기차를 빌려 타고 가까운 공항 근처 이호 테우 해변으로 달려본다. 멀리서 말 모양의 빨강, 하양의 등대가 보인다. 아침을 맞으며 호젓한 해안가에서 맑은 하늘과 바닷바람을 맞아보고 싶었을까. 살랑이는 제주의 아침 바람은 차지도 않고 기분 좋은 냄새로 마음을 들뜨게 한다. 들이키는 숨소리와 볼을 스치며 안기는 바람마저 포근하게 느껴진다. 딸과 같이 와 본 적 있는 지난날이 생각나서 슬며시 미소 짓게 된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적당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번에는 협재 해수욕장 옆으로 숙소를 정했다. 늘 상 서귀포나 동쪽으로만 움직였기에 가보지 않은 서쪽으로 가볼 참이었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노란 유채가 한창이라 어디를 가던 햇살 아래엔 노란 물결이 만발이다. 사람들은 유채가 있는 곳이면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따뜻한 봄을 만끽하고 있다. 노랑으로 물결치는 밭에 검은 현무암과 대비되는 푸르른 바다와 하늘이 있는 제주. 따뜻함과 함께 제일 먼저 봄을 맞이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눈길 닿는 곳마다 마음이 설렌다. 여름도 아닌데 혼자서 마음껏 해변을 즐기고 사람이 없음을 느끼고 싶었을까? 호텔은 조용하고 평소였다면 얻기 힘들 바닷가 쪽의 방을 배정받는다. 밝은 기운이 들어오고 바람이 살랑이는 기분 좋은 전망의 방이다.
친구, 가족과 엄마와 딸이랑 같이 오긴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보긴 처음이다. 남편도 내가 보고 싶을까? 아니면 그립긴 할까? 같이 가자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데려올 걸 그랬나 싶다. 짐도 단출하고 마음은 가뿐하고, 홀로 지낼 시간이 기대된다. 근처 협재 해수욕장 바닷가를 산책하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어 본다. 멀리 비양도가 보이고 은모래가 넘실대는 바닷가 모래사장이 그림 같은 아름다운 해변이다. 느린 산책을 마치고 밝은 햇살이 들이치는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어본다. 가볍게 읽기 시작한 책을 마저 읽고 나니 출출하다. 근처 가고 싶은 고기 국숫집을 찾아 나가 본다. 서울 서는 이런 맛이 안 난다. 오랜만에 맛보는 국수에 행복함이 깃든다. 별 비싸지도 않은 국수 한 그릇에 이렇게 좋아도 되는 것인가? 근처 예쁜 카페를 찾아 멈춰 서서 들어가 라테를 한잔 시켜 놓고 사진 찍기 놀이를 한다. 파란 하늘에 푸르름이 넘실대는 바닷가가 보이고 조용한 카페에 앉아 나는 단지 바라만 볼뿐. 이런 사치가 어디 있을까?
다음날 내 버킷 리스트에 있던 한라산에 올라가려 어제보다 더 서두른다. 입장하는 시간이 있기에 부지런을 떤다. 평일이라 마감이 안되어서 다행이다. 날씨가 안개가 꼈기에 오늘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싶다. 그동안 체력을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혼자 산행은 조금 무리일까? 바지런히 걸어본다. 4시간 정도 걸려서 오르고 오르다 보니 드디어 제주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힘들구나를 느낀다. 남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오는데 나는 혼자라서 외롭다. 다시 온다면 산 좋아하는 짝꿍이랑 같이 올라보고 싶다. 드디어 정상이다. 나도 백록담에 왔다.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겨본다.
어제 산행이 힘들어서였을까? 산방산의 탄산 온천이 좋다고 하여 가본다. 한라산 산행이 고되긴 했나 보다. 따뜻한 온천물에 들어가니 스르르 몸이 녹는다. 이게 바로 힐링 여행이 아닐까 싶다. 실컷 물에 젖어 있다 보니 배가 고프다. 근처 맛있는 고깃집에 가서 흑돼지 정식을 점심으로 먹는다. 역시 제주는 맛집이 많다.
아침에는 호텔 조식, 점심은 근처 맛집에서 한 끼, 느지막하게 멋진 카페를 찾는다. 호텔 조식이라 별것 없지만 깨끗하고 맛있는 찬이 가득이다. 하나같이 맛있다. 시간 나면 바닷가를 거닐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어 본다. 그리고 가끔 블로그에 들어가 글을 보고 읽은 책을 정리한다. 며칠 동안 여유 아닌 여유를 부리고 사치를 누려서 인지, 나른하고 마치 내가 이국에 온 거 같다. 하긴 탐라국이니까 그렇지 하며.
협재 해수욕장 근처 한림 공원엘 가본다. 이국적인 야자수와 여러 하르방과 정원으로 이루어진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협재굴도 들어가 보고. 왕벚꽃이 만발한 공원엔 튤립이 벌써 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꽃 천지를 볼 수 있어서 좋다. 마치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슬슬 집에 갈 시간이 되어가니 집이 궁금하기도 하다. 친구들은 연락이 오며 같이 가지 그랬냐는 멘트를 날리고 있다. 다음에 같이 오자고 웃으며 대답하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운동화를 손에 들고 모래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바닷물에 손을 얹기도 하니 아직은 차가움이 느껴진다.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니 그동안 쉴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말해준다. 살면서 떠나온 나의 일상으로의 복귀는 더 나은 시간을 살라한다. 그동안 수고해 준 나에 대한 보답이었으니까 나도 고마운 시간이었다고 해본다. 뒷정리를 하고 호텔을 나와서 공항으로 향한다.
나이 들면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제주지만 가끔 와도 좋겠다. 시간과 물가가 발목을 잡지 않으면 다시 훌쩍 와봐야지 하는 맘으로 떠나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산에 올라서 좋았고 혼자라는 시간을 견디는 게 익숙해질 나이여서인지 나를 정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할까? 그동안 남과 같이 와서 많은 것을 느끼며 담아 갈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면 이번엔 인생의 정점을 한번 찍어본 시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 살면서 가족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 시간들 속에 나를 위한 쉼과 보충은 없었다. 비타민을 먹은 것 마냥 충전이 되어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감사함 아니겠는가?
어디를 열심히 다니고 눈에 담는 것만이 중요하지 않다. 젊을 때는 시간이 아깝고 보고 싶고 경험해 볼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것보다 쉼과 휴식으로 나를 채우는 것도 중요함을 알 나이가 되었다. 떠나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충전인 게다. 길다면 길고 짧지 않은 휴식으로 인한 시간은 나를 더 여유 있고 윤택한 마음을 갖게 한다. 따뜻함으로 보듬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내게 듬뿍 부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