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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Feb 27. 2024

껌딱지

딸이 방학이라 바쁘다며 소홀하더니 휴가 받아 집에 왔다. 상전이 따로 없다. 먹고 싶은 걸 물어봐도 많이 먹지도 않는데 이것 해주랴 저것 해줄까 모시는 입장이다 보니 까다롭기 이만저만 아니다. 대학원생인 딸은 방학이라도 연구소에서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좀처럼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하리. 볼 때마다 비위 맞추기 바쁘다.

뭔 일이신지 선뜻 데이트를 제안한다. 오늘은 엄마랑 시간 보내신다면서 뭘 하고 싶냐 한다. 노래방 가고 싶다고 외쳤더니 그게 그렇게 하고 싶었냐고 묻는다. 자녀들이랑 노래방을 가본 적 있으신가? 작년 가을 식구들과 강화도 놀러 간 적 있는데 펜션에 노래방이 있었다. 딱히 뭐 할 것도 없고 해서 노래방기계를 켰는데 난 아이들이 그렇게 기막히게 잘 부르고 흥이 많은 줄 몰랐다. 들어는 봤지만 가사 모르는 노래부터 신나는 곡, 팝송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노는 것을 보면서 놀라고 신기했다.


자녀들이랑 같이 놀고 싶을 땐 노래방 강추한다. 근데 자녀 입장에선 꼭 재미있지 않을 순 있겠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들이 모를 수도 있고 지나간 노래일 테니 되도록이면 신곡으로, 자녀들이 알만 한 곡으로 선곡하시길. 신촌 살면서 딸과 단둘이 코인노래방은 처음 가봤다. 요즘은 직원 없이도 들어가서 빈방에서 결재하고 선택하며 노래 부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신세계다. 기기가 얼마나 좋은지 펜션의 노래방은 구식이었다. 마이크며 화면, 소리의 대응이 남다르게 스마트하더라.


신나게 노래 몇 곡 부르고 딸이 부르는 노래와 같이 즐기는 시간이 스트레스야 저리 가라였다. 몇 곡 부르고 나니 출출해져 태국 음식을 먹으러 갔다. 난 이곳에 태국 음식점이 있는 줄도 몰랐다. 쌀국수와 팟타이를 시켰는데 베트남 쌀국수는 순한 반면 타이 쌀국수는 진한 팔각의 향이 우러나는 한 향신료의 맛이다. 고수도 듬뿍 넣어줘 진하고 검은 국물에 소고기, 숙주, 가는 쌀국수 면이 착 감겼다. 팟타이도 새우와 숙주, 야채와 쌀국수의 볶음과 달콤 짭짤함이 잘 어우러졌다. 신세계였다고 할까.


아마 누구랑 같이 먹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동안 바쁘다고 집에 오지 못하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속셈이었겠지. 모른 척 껌딱지처럼 쫙 붙어있는 딸이 오늘따라 정겹다. 원하는 기본 정장식 재킷이 하나 필요하다고 해서 백화점으로 갔으나 폐점 시간이 가까웠고 원하는 색상이 없어서 휙 둘러보곤 바로 나와야 했다. 스티커 사진 찍자고 해 포토샵에 들어가 보니 배경, 원하는 프레임, 색 등을 선택하고 사진 개수를 정해 결재하면 된다.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이쁘게 입고 올 걸 하는 맘이 들었지만 이마저도 재미있는 경험 아닌가. 인쇄된 사진을 받고 선 아이스크림 사들고 집에 돌아오니 하루가 금방 저물었다.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짧고 반갑고 아쉽다. 점점 더 나에게 허락하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 지금을 온전히 즐겨야지 하는 마음뿐이다. 어느새 저녁이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전보다 낮이 더 길어진 느낌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붙잡고 싶지만 이렇게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게 행복이다. 그래, 오래도록 엄마 껌딱지 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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