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봄이 오기 전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동생은 우크라이나 선교사다. 어릴 때 가족끼리 소풍을 다녀온 적도, 여행을 간 적도 없었다 했다. 그러니 우리 세 식구 모두 함께 제주도에 가자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며 한국에 삼월에 들어가면 잠시 일정을 내 볼 테니 한번 같이 가보자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에 가족이 같이 어디 놀러 간 적도, 여행을 간 적도 없음을 알았다. 늘 시골로 외갓집이나 친할머니네 가는 것 외엔 바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본 기억이 없었다. 바로 그러자고 했다. 나도 엄마가 조금이라도 젊을 때 같이 보내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여겼다. 흔쾌히 대답했다.
"그래. 나머지는 내가 알아볼게."
티켓팅을 하고, 리조트와 렌터카를 예약했다. 수업을 끝내고 늦게 제주도에 도착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나 보다. 엄마의 증상을 눈치챘던 게. 엄마는 당뇨약을 잘 안 챙겨 드셨다. 그래서인지 가끔 고혈당으로 힘들어했고, 왜 힘든지도 모르는 듯했다. 배부르게 제주의 맛집을 찾고 음식을 즐기고 나서도 늘 허기져했으며 먹은 것을 잊곤 했다. 나랑 동생은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챘다. 그래서 서울에 오자마자 치매예방센터에 연락을 해서 검사를 받았다. 몇 년 전 한번 검사를 받은 기록이 있기에 그때와 차이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견서를 써주면서 병원을 방문하라고 했다. 가까운 세브란스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으니 삼 개월이나 더 기다려야 한단다. 아는 선생님께 부탁을 해봐도 일정을 당길 수 없어서 꼬박 그 시간들을 기다려야 했다. 멀리 병원을 모시고 다니기에는 내게 허락되는 시간이 많지 않기도 했다.
여러 검사를 받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진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소개해 준 의사는 혈관성 치매가 의심된다고 했지만, 정작 담당의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이 혼재해 있다고 했다. 그러고도 일이 년이 지난 뒤에 '루이소체 치매'라는 진단을 내렸다. 작년 가을쯤 진단을 받고 건보료 감면을 받은 걸로 봐서 아마 이삼 년쯤 걸린 것 같다. 간간이 검사와 MRI, PET (단층촬영으로 주로 뇌를 검사함) 촬영 등 고가의 장비를 이용하는 비싼 검사를 했다. 인지검사도 하고 의사의 소견을 들으면서.
그렇게 엄마 병의 진행을 보면서 나는 나를 많이도 괴롭혔다. 동생은 한국에 없고 가족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나는 내 삶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늘 나를 짓누르는 무게 때문에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동생은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나를 향한 짐을 져줬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나도 힘든 삶을 사는 동생을 대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쩔 수 없다 여겼지만그렇다고 내게 주어진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늘 가슴이 턱턱 막히는 것을 경험했고, 뒤돌아서면 답답한 현실에 눈물 흘리기 일 수였다. 가족에게 맘 놓고 말하지도 못했다. 아직 어떤 진단도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고, 시댁에 이런 상황이 알려지는 것도 싫었다. 아마도 내 치부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엄마의 증상을 알아채기 몇 년 전쯤 뇌경색이 왔었다. 그때 많이 놀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험을 했기에 다시는 그런 아픔이 올 줄 몰랐다. 살면서 어디 쉬운 일만 있을까? 힘든 일은 갑자기 떼를 지어서 온다고 여겼다.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일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에 늘 힘든 현실에 마음 졸여야 했고 편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이 제어가 안됐다. 더더욱 일에 매달렸고 밖으로만 돌았다. 내 마음을 숨겨야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나를 힘들게 하면 마음이 좀 가벼워질 줄 알았나 보다. 애써 발버둥 쳐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는데.
그때 동생이 같이 제주도를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엄마의 증상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병이 진행된 뒤 병원을 찾았을 수도 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글픈 생각에 눈물짓던 생각이 난다. 유채가 흐드러지게 핀 맑간 하늘 아래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으니까. 그때부터였나 보다. 사는 게 왜 이렇게 덧없고 힘들다고 느껴졌는지. 알 수 없는 울분이 밀려왔고 때때로 감정이 제어가 안됐다. 늘 마음이 오르내렸다.
마음보다 몸이 더 지치고 힘들었을까?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오고 내가 하던 일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야 알았다. 내가 얼마나 나를 아끼지 않고 힘들게 했는지. 여기저기 몸이 아팠다. 어깨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양쪽 팔 모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내 몸을 혹사하고 마음을 도려내고 있었음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을 드나들며 치료와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다. 담당의는 회전근개 파열이라 했지만 검사를 해보니 그도 아니었다. 다른 의사는 근육의 경직으로 인한 근육통으로 진단했다. MRI나 비싼 검사를 받았어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괜찮다고 하지만 내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지인이 침을 맞아보라고 해서 한의원을 다녔다. 관절과 관절 사이를 대침으로 놓는 거라 아픔을 참으면서 맞았다. 나아지는 듯 하나 그것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 결과는 참혹했다. 열심히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때때로 나를 돌볼 줄 모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더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늘 손을 사용하는 일을 많이 하는 귀한 금손이라 여겼지만 정작 나를 아낄 줄 모르는 어리석음만 있었다. 내게 한없이 미안하고 슬퍼서 소리 내 울었다. 한 번은 설거지를 하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틀어 놓은 수도에서 연신 물이 흘렀고 내 눈물도 그치지 않았다. 남편이 보았는지 나 모르게 아이들 보고 엄마에게 잘하라고 했다.
이제야 내 맘을 들여다보고 애쓴 나를 괜찮다 여길 줄 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야 함도, 나를 돌보는 게 내 가족을 사랑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산을 오르고 마음을 다스리며 내려놓아야 함도 배운다. 거저 나이를 먹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제라도 하나씩 배워간다. 어두운 터널을 지난다 여겼지만 언젠가는 터널도 끝이 있다 여긴다. 나도 좋은 날 있겠지 하고. 전염병으로 인한 멈춤은 내 삶에 쉼을 주고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로소 내 마음을 돌아보고 쓰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다. 지나고 나면 이유 없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자리 어느 곳에 가던지 하나씩 이뤄지고 해결됨을 보듯이, 내 시간도 어느덧 익어가는 시절이 되었다. 잘 살았다 생각되는 그런 내가 되도록 나를 보듬고 아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