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지어 한 다발을 들고 온 그날부터 달랐다

봄이면 기억나는 선물(전쟁의 피해로부터 자유롭기를)

by 최림


"정문에 남자분이 찾아왔는데요?


"네? 누구요?"

어느 봄날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누가 찾아왔다며 경비실 아저씨들이 나를 반겼다. 남자 친구 아니냐고. 누나 생일이라 동생이 샛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을 들고 왔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마침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서 회사 식당도 구경시켜 주고 혼자 쓰는 사무실도 보여주었다. 아마도 내가 어떤 곳에서 일하는지 궁금해서였을까? 그때 사원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영양사였다. 막 햇병아리를 떼지도 못한 어린 여사원. 그런 내게 꽃을 들고 찾아온 동생은 그날의 선물이었다. 집에 갈 때까지 직원들의 축하 인사를 들었다. 볕 좋은 날 노란 꽃다발을 들고 기분 좋게 퇴근을 했다.



그렇게 프리지어를 한 아름 안겨주던 동생은 홀연 카자흐스탄으로 여행을 떠났다. 선교여행이란 낯선 이름의 여행.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슬림이 많은 그 동네를 보고 겪더니 갑자기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러시아 말을 배우러 다녔다. 난 갓 회사에 발을 내디딘 때라 동생의 일엔 별로 관심이 없었나 보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오고 우크라이나를 한 번 가더니 선교사가 되겠단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코트라 KOTRA에서 만난 여학생과 사귀었다.



전 국민이 밀레니얼을 외치며 떠들썩하던 이천 년이 지났다. 이듬해 겨울 목사 안수를 받고서 결혼을 하고, 곧바로 우크라이나로 날아갔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서둘러서 출국을 했다. 동유럽 그 나라는 땅덩이는 크지만 백인 우월주의라 러시아와 가깝고 아시아인을 우습게 생각한단다. 무슬림은 아니지만 러시아 정교회를 믿어서 개신교는 발을 붙이기가 어려운 나라였다. 때때로 필요하다는 물건을 EMS(우체국 국제택배)로 DHL로 보내고 가끔 먹거리를 챙겼다.



년에 한 번 입국할 때마다 신경이 날카롭고 뾰족했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사는 게 녹록지 않음이라 여겼다. 간간이 다른 이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중국인과 구별이 되지 않아 길에서 맞기도 하고 유치장에 갇히기도 하는 모진 수난을 견딘다고 했다. 걱정할까 봐 식구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견뎌야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실 삼대독자였지만 딸만 하나다. 박봉의 선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자식을 더 낳는 것은 교단에도 짐을 지우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가끔 올 때마다 우크라이나의 초콜릿이며 엽서, 꿀이나 파스타를 선물로 주었다. 비교적 저렴하면서 맛있는 것으로.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밀 생산지이다. 나는 하드 계열 빵을 곧잘 한다. 동생네는 내가 만든 유럽 빵이 먹고 싶어서 인지 가게를 내고 싶어질 만큼 맛있는 빵이라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대학 선교로 국립 세무대학에서 부부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정교회가 국교인 나라에서 그것도 외국인이 국립대 교수를 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작은 도시에서 살기에 조카가 학교의 유일한 동양인이다.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대접을 안 해주는지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견디고 공부도 곧잘 한다. 곧 졸업이 다가와서 한국의 대학으로 올 수 있을지 준비하고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한국인 대피명령이 떨어졌다. 대사관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본국을 떠나지 않으면 여권이 말소가 된다. 여권이 없다는 것은 국제 미아가 된다는 것이다. 어디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학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끝까지 남아있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동을 했다. 그사이 푸틴은 군대를 배치해서 국경의 대부분을 막아놓았다. 키이우(제1도시)에 가는 것도 어렵고 가서도 비행기가 결항이라 며칠씩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우리는 탈출하지 못할까 봐 맘을 졸였다. 온 교회와 교인들이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를 했다.



다행스럽게 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거기서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칠일 간 방역 때문에 격리를 하느라 숙소를 나올 수 없었지만 그동안 잠을 못 자고 긴장한 탓인지 식구들이 내리 잠만 잤다. 연락도 안 되고 먹을 것을 갖다 줄 수도 없었다. 친구들을 두고 혼자만 떠나야 한다는 조카의 맘이 어땠을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오월이면 졸업인데 몇 개월 남지 않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23년간 홀로 떠나서 자기의 인생을 바치고 시간과 건강을 투자해서 이뤄놓은 교회와 학교를 놓고 와야 했다. 그 마음이 어떨지 헤아릴 수 없음이다.



간간이 예배로 단상에서 그곳의 이야기를 듣고 본다. 여태껏 이십여 년간 들어온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최근 한 달간 듣고 보았다. 같이 이동하던 차 안에서 핵발전소 옆이 폭파되었다는 이야기를 현지인들이 보내는 카톡과 영상을 첨부해서 부지런히 방송사와 신문사에 보낸다. 여기서도 쉴 새 없이 지내고 있다. 살면서 처음으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전쟁 반대 시위를 해봤다며 웃는다. 핵만 터지지 않는다면 두 달 뒤 다시 현지로 들어갈 방법을 찾고 외교부와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다. 재건사업을 할 거라고.



어느새 동생의 머리에 희끗한 서리가 내려앉고 건강은 언제 챙겼을지 모르는 몸으로 우크라이나를 위해 달려 나간다. 내게 노란 프리지어를 갖다 주던 앳된 얼굴의 내 동생. 우크라이나 국기처럼 노랑과 파랑이 뒤섞인 젊음이 저만치 지나간 얼굴을 하고서. 현지 학생들과 성도들이 보내오는 카톡과 소식을 받아서 내용을 전해주고 현지인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 식구들 모두가 전쟁으로 피난 온 학생과 성도들을 각국의 선교사들과 연결해 주고 살피며 밤에는 인터넷으로 수업을 한다. 살던 도시가 폭격으로 학교도 일부 파괴되고 학생들은 연락도 안 되는 이들이 늘어간다며 걱정이다.


사람의 삶에는 여러 모양과 색이 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인생을 조용히 탐해본다. 어떤 이는 본인의 짐만으로도 힘들어하고, 누군가는 내가 아닌 남의 짐을 대신 지고 있다. 한 번뿐인 인생, 누구나 같은 시간과 세월이 주어진다. 그러나 돌아보면 알 수 있을까?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살아가는 생은 어떤 것일까? 삶이란 뒤돌아 봤을 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아닐까 한다.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순간 궁금해졌다. 부디 전쟁의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그리고 삶의 터전인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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