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민학생 때 엄마는 늘 바쁘셨다. 그럴 때면 나는 동생과 같이 점심을 차려 먹거나, 하교 후 부엌의 찬장에서 먹을 것을 찾곤 했다. 그때 우리 집엔 스테인리스로 된 밥그릇과 대접, 국그릇 등을 사용했다. 스테인리스로 된 밥통도 있었는데 밥을 덜어다가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과 함께 덮어두곤 했다. 요즘 같은 전기밥솥이 없던 시대라 따뜻하게 보온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요즘에야 스테인리스뿐 아니라 은과 금으로 된 수저나 나무로 된 것 등 다양한 것을 사용하지만 그때는 집집마다 스테인리스로 된 수저와 그릇들 뿐이었다. 이쁜 유리그릇들이 종류별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건만 분명 스테인리스로 된 그릇과 수저의 쓰임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우리 집엔 스테인리스로 된 주걱이 2개 있었다. 큰 것은 더 낡고 연식이 오래되어서 납작하게 변형이 되었고, 하나는 나중 구매한 것이라 아기 손바닥 만 한 크기였다. 늘 엄마의 부엌에선 밥을 푸고, 감자를 채 썰어서 볶고, 어묵을 간장과 설탕에 달달하게 조리는 데 사용되었다. 맛있는 빵을 만들어 뒤집거나 꺼낼 때, 밥을 비비거나 볶을 때 사용하던 주걱. 엄마가 없을 때는 내 차지가 되기도 했다. 조그만 전기 쿠커에 육수를 우리고 고추장을 풀어떡볶이, 어묵을 넣고 끓일 때 사용하곤 했다. 겨울이 되면 만두를 대량으로 만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늘 김치를 다져서 꼭 짜고 두부를 눌러서 물기를 제거한 뒤 섞는 용도가 되기도 했다. 늘 상 내 생활과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주걱이었다.
난 다른 집에도 스테인리스로 된 주걱이 있는 줄 알았다. 여태껏 방문했던 집 어디서도 본 적 없다. 내가 결혼을 하고 새살림을 시작했을 때다. 우리 집엔 전기밥솥을 살 때 따라온 플라스틱 주걱만 있었다. 사용하다 보니 밥풀이 들러붙고 열에 약해 변형되기 일 수였다. 별로 위생적이지 않은 플라스틱 주걱이 싫었다. 엄마네 가서 보니 엄마는 30여 년이 넘게 스테인리스 주걱을 사용하고 계셨다. 심지어 내가 어릴 때 쓰던 밥그릇도 있고, 스테인리스 컵과 밥통도 아직 사용하셨다. 손때 묻은 물건이라 반갑기도 하고 '아직도 이걸 사용하나' 생각도 드는 제품들. 가끔 삶아서 사용하기만 해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릇들. 유독 밥주걱이 부러워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나 쓰라고 작은 주걱을 가져다주셨다. 그렇게 스테인리스로 된 주걱은 십여 년 전 내게로 와서 나와 내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할 때 사용하고 있다.
별 특별하지도 않은 민무늬 스테인리스 주걱. 아빠가 세상에 계실 때부터 함께 했으니까 엄마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나와 내 가족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이쁘고 비싸고 금으로 칠 한 것도 아닌데 난 왜 이런 뭉툭하고 못생긴 주걱을 가지고 싶어 했을까. 어린 시절 나와 함께 하고 엄마의 정성과 사랑, 엄마의 손맛이 스며서일까? 엄마의 손길에 닳아버린 물건이라서 일까? 툭툭해지고 무뎌진 모습이지만 내가 십여 년을 더 사용했듯이 아직도 나랑 오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거 같다. 그동안 나는 김치를 담그고, 밥을 푸고, 맛깔난 반찬을 할 때마다 내 손에서 오래도록 함께 놀 것이다.
살면서 비싸고 좋은 물건만이 탐나는 건 아닌가 보다. 손잡이도 짧고 내 손에 익은, 어릴 때부터 사용하던 이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올 줄 몰랐다. 백화점 좋은 자리에 놓인 화려하고 이쁜 주걱들을 마다하고, 때로는 건지게로, 주걱으로, 뒤집개로 사용되곤 하는 스테인리스 주걱. 나도 이런 못생긴 낡은 주걱처럼 나이 들어가고, 시간이 갈수록 삭아서 모양이 변하겠지. 그렇지만 내가 세상에 온 이유가 이런 주걱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한다.
처음부터 투박하고 몽땅한 모습은 아니었을 게다. 샤프하고 반짝이던 분명 새것인 물건이지만 세월에 따라 시간이 지나고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변형되고 쓰임 받고 이용되는 도구. 나도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 주걱처럼 누군가에게 사용되고, 내 아이들의 시간에 늘 함께하며, 나의 땀과 정성을 쏟아 남을 위한 상을 차리는 일을 함께 했다.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은 없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밥상을 만들고, 부엌에서 함께하는 많은 시간들을 나와 함께 보낸 주걱. 앞으로의 내 시간도 이 주걱처럼 낡아서 모양이 변하겠지만,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야 마는 그런 시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