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건물 엘리베이터에 젊은 엄마와 초등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탔다. 하얀 얼굴에 작고 귀여운 밝은 파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눈에 확 띄었다. 전단지를 꼭 쥐고 있는 작은 손과 둥근 모양의 밝은 안경테가 답답한 공간을 밝혀주는 거 같았다. 동그란 안경테의 앳된 얼굴.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스친 어린이를 보면서 내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아들은 책을 좋아했다. 심지어 책을 통째로 외워서 글을 익혔고 매일 읽어달라 가져오던 책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읽어 토시까지 잊지 않았다. 잠시 조용하다 생각되면 어느 구석에서건 책을 읽느라 심취했다. 그렇게 유치원생이던 아들이 어느 날부터 눈을 자꾸 비벼서 안과에 데리고 갔다. 시력을 측정하니 아뿔싸 내가 너무 방심했나 보다. 안경을 써야 한다는 처방과 함께 근시가 있다고 알려준다. 초등학교도 가기 전이었는데 적잖이 당황했다.
안과 방문은 입학 전 예방 차원이었지만 남보다 이른 안경 착용을 불러왔다. 정기적으로 시력검사를 했고 갈 때마다 시력 저하로 안경의 도수가 점점 높아져 갔다. 작고 귀여운 얼굴에 안경알의 두께가 점점 깊어지는 시기였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시력이 더 나빠지면 성인이 되어서 라식도 불가할 수 있다고 했다. 라식은 각막을 깎아내는 시술이라 각막의 두께가 너무 얇으면 시술 자체가 안된단다. 그러면서 '드림렌즈'를 권유한다. 말 그대로 꿈의 렌즈였다. 자는 동안 착용하는 하드렌즈였고 밤에 각막을 눌러주면 하루 정도는 안경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들과 상의 후 고가의 금액을 주고서 선뜻 결재를 했다. 잠시 안경을 벗을 수 있다는 말에 앞뒤 생각 없이 홀렸나 보다. 그날부터 렌즈 착용을 위한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초등생에게 렌즈의 착용은 쉽지만은 않았다. 시력이 좋았던 나는 안경이랑 거리가 멀었지만 아들의 렌즈를 관리하고 세척하고 눈에 넣어 착용하게 돕는 모든 일이 내 일이 되었다. 이를테면 비싼 돈을 지불했음에도 아들의 시력관리를 위한 일은 온전히 내가 맡게 되었으니까.
서로에게 쉽지 않은 일이 매일같이 지속되었으나 드림렌즈를 착용하는 동안 시력 저하는 막아주었기에 그나마 만족할 수 있었다. 전날 힘겹게 렌즈를 착용하고 나면 다음날은 안경 없이 학교를 가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적응이 되어갔다. 아들은 안경을 안 쓰는 일상에, 나는 관리를 하는, 서로의 관점에선 착용하는 사람과 관리하는 사람의 입장 차라고 나 할까. 아들은 안경 착용을 싫어했지만 렌즈도 힘들어했다. 잠깐의 불편함도 싫어했으니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도 초등생에게 렌즈를 끼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관리 소홀로 렌즈에 스크래치가 나버렸다. 더 이상 효과를 보기 어려웠기에 자연스럽게 렌즈와 멀어졌다. 그 뒤로 가끔 시력 측정을 하러 가고 성장하는 동안은 안경의 도수가 좀 더 내려가게 되었다. 그동안 딸도 원시가 살짝 있어서 안경을 쓰게 되었고 나도 가족 중 마지막으로 안경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가족 모두 안경을 착용하게 된 날 안경 쟁이 세상으로 입문을 축하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들이 처음으로 7살이라는 나이에 안경을 착용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조그만 얼굴에 작은 안경을 얹어놓으니 꼭 해리포터 같은 귀여움이 있었다. 조그만 검은테 안경을 시작으로 빨간 뿔테, 검은색 뿔테 등 여러 가지 안경을 썼다. 학창 시절엔 성장이 진행될수록 시력의 저하가 급격하게 진행되니까 더 빨리 안경의 숫자가 바뀌었다. 부모 입장에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아들 친구들이 하나 둘 라식 수술을 하면서 안경을 벗고 있다. 혹 안경을 벗고 싶지 않으냐 물으면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을 보면 나는 미리 걱정을 했던 건 아닌가 싶다. 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왜 먼저 걱정했던 걸까? 모두가 라식을 할 수도 없지만 하더라도 일정 시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후유증이 있단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눈이 작아 안경을 벗었을 때의 두려움이었을까? 엘리베이터에서 본 안경 쓴 어린 친구 모습에 마음이 짠해지는 건 비단 나만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