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잘생긴 20대 남성과의 데이트는 늘 즐겁다.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커피랑 밥도 사고, 팔짱 끼고 추운 겨울 길을 걷는다. 내가 좋으니까. 잘생긴 젊은이와 3주에 걸쳐서 미술관 데이트를 한다. 시립미술관에서 호주 특별전을 보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 특별전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박수근 특별전까지 매주 함께 한 시간이다. 시간 날 때마다 따라나서니 즐겁고 함께 시간 보낼 수 있어서 복 받았다.
덕수궁 미술관은 대학생 아들은 무료입장, 나는 쿠폰에 할인까지 받아서 2000원으로 입장했다. 미술관 구경하는 값치곤 저렴하다. 이번엔 박수근의 작품을 최대한 볼 수 있고 미공개 작품도 있다 하여 기대되던 참이다. 스케치 작품도 있고 젊었을 때부터 작고 전까지의 작품이 많이 전시되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작품과 개인 소장품들도 많이 출품되었다. 보지 못했던 많은 작품과 교과서에서 배웠던 그림 등 여러 화풍과 변화를 볼 수 있는, 오로지 박수근이라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가 공부하려 스크랩했던 신문기사라든지, 직접 그린 연하장, 수집했던 잡지 등도 같이 전시되어서 보는 맛이 있다. 초기의 스케치와 작품 구상을 위한 드로잉도 많다.
박수근 초기작으로 신문에 연재한 삽화
초등학교만 졸업한 박수근은 밀레 같은 작가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했단다. 얼굴은 잘생긴 귀공자 타입이라 평생 힘든 일도 안 해봤을 거 같은데 부인을 얻을 때 로맨틱하게 고백도 하고, 참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와 결혼하면 곤궁함은 못 벗어나겠지만, 평생 마음의 행복은 함께 할 수 있다고 청혼을 했다. 화가는 말도 생각처럼 아름다운가. 얼마나 인간적이고 좋은 사람인가. 평생 자기만의 그림을 추구하고 성실하게 같은 그림을 포인트를 달리해서 여러 개의 작품으로 남겼다. 그것만 봐도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수근 '노상에서'
특히 그의 그림은 색을 많이 사용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많은 색을 바탕으로 칠하고 덧입히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그림에는 밝은 색을 많이 사용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게 마음에 든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왜 이중섭과 박수근을 꼽는지 알 것 같다. 서민의 모습과 여인, 아이들의 모습을 주제로 그리고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일반인 들을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아내를 모델로 절구질이나 맷돌질하는 모습이 많다. 아내는 곤궁함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평생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함을 알기에 싫은 소리 한 번을 안 했단다. 역시 좋은 부인을 두었다. 그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남편이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그림을 사러 손님이 오면 잘 대접했다고 하니 그 마음이 아름답다. 그림을 팔아야 먹고살았으니 그럴 수 있지만 사진 속에 남은 그의 그림들이 돋보인다.
박수근 '길가에서 (아기 업은 소녀)'
평생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 어찌 생활의 곤궁함과 입에 풀칠하는 어려움을 몰랐을까?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고 스카프를 만들어 팔면서 집을 마련한 뒤엔 작품 활동만 했단다. 50년대부터 그렸으니까 물감 하나도 사기 힘들던 시대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 자기 결정에 대한 화답을 본업에서 한 셈이다.
박수근 '나무(나무와 두 여인)'
전쟁 직 후 PX에서 근무 당시 만난 인연으로 '나목'을 써서 등단 한 박완서를 만날 수 있다. 이런 인연이 있나. 역시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걸까. ‘나목’은 박수근을 미화해서 써 내려간 작품이나 고목인 줄 알았던 그 나무가 알고 보니 나목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고목과 나목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다. 고목古木은 키가 큰 나무고, 여러 해 자라 더 크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다. 반면 나목裸木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다. 이 차이가 무얼까? 고목은 더 이상 성장을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나목은 지금은 헐벗었지만 살아있는,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나무라는 뜻이 아닐까? 박수근을 향한 최고의 찬사라 한다.
박수근 '농촌풍경'
그림과 글로 생각과 시대상,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그리는 사람의 마음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박수근 그림이 따뜻한 시선이 있었던 데는 그의 마음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듯, 글도, 그림도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나를 알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있나? 되묻고 싶다. 좋은, 아름다운, 인간적인 그런 사람이 되어야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닐까? 오늘 밤 나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빌딩 숲 사이로 들어가서 설렁탕 한 그릇 먹고 아들과 서둘러 귀가를 했다. 세월이 참 좋다. 아들이랑 3주에 걸쳐 미술관 투어를 하고, 따뜻한 기운들을 받아서. 좋은 기운은 늘 상 좋은 시간과 생각들을 몰고 오는 걸까. 마음 가득 아름다운 생각이 들게 하고 눈 호강과 더불어 한가득 감사함을 갖게 한다. 새삼 일상의 소중함과 주어진 시간에 고마움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