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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림 Sep 27. 2022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바라보며

이모의 장례를 지내면서


이모가 돌아가셨다. 엄마 언니인 이모는 근처에 살아 어려서부터 왕래가 잦았고 사촌 중 유일하게 가깝게 지냈다. 월요일 병원에서 스텐트 삽입술을 받고는 하루 지나도 퇴원을 하지 못했다. 호흡이 자유롭지 못해 자동 심박 기를 달고 부정맥이라 퇴원을 늦추고 여러 시술이 추가되더니 급기야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평소 큰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간단한 시술이라 여겼던 삽입술이었는데 결국엔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말았다. 입원한 지 나흘 만에 일어난 일이다. 식구들 모두 아무런 준비 없이 추석이 지난 열흘 만에 가족을 잃었다. 입원부터 장례까지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이다. 남편인 이모부는 황망함을 감출 길이 없다. 첫날엔 아무 말도 못 하시더니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식음을 폐하셨다. 사촌들은 눈이 퉁퉁 부어서 마스크로 가린 얼굴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갑자기 가족을 잃은 소식으로 지인과 친척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가깝게 사는 우리는 장례 기간 동안 매일같이 방문해 위로를 하고 가시는 길을 돌봤다. 멀리 이십여 년 넘게 한국을 떠나 있던 동생 내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맞는 장례절차였다. 코로나 초기에 올케의 친정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우크라이나에서 나올 수도 없어서 최근까지 힘들어했다. 화장터에 가서 여러 모습들을 보니 울컥했는지 엄마가 떠오른 올케는 울기만 했다. 장례절차를 보고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며 눈물 흘렸을 것이다. 마음 쓰이고 시려 조용히 등을 쓸어주었다.


오후 늦게 장례를 잘 돌봐줘서 고맙다며 연락이 왔다. 사촌에게 "고생 많았다."라고 대답을 하니 "살아계실 때 이모(우리 엄마)에게 잘해라." 한다. 며칠간 같은 말을 들어서 별반 감흥이 없기도 다. 사실 장녀라는 위치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건네는 말속엔 나를 향한 폭력적이고 암묵적인 말이기도 했다. 남들이 배려라고 건네는 말속에 들어있던 엄마를 위하는 말엔 나를 향한 배려는 없었다. 묵시적이고 강압적인 내용만 있을 뿐 그들에겐 자기의 자식에게도 하지 않는 말들을 너무나 쉽게 입 밖으로 뱉어낸다. 남을 향한 오지랖일 수도 있다. 건네는 말속에 그래야 한다는 알고 싶지 않은 폭력이 도사려 있고 나에게 주어지는 결과보단 압력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평생 사십여 년이 넘게 듣던 말이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냥 눈 감아지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사촌이나 삼촌들 내외에겐 엄마의 상태를 알리진 않았다. 그들에게 건네는 소식엔 나를 향한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 엄마에게 향하는 안타까움에 건네는 말뿐이니까. 엄마의 치매를 알았다 한들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되려 내게 지워지는 짐의 무게만이 더 늘어날 뿐이니 차라리 입을 떼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가고 시간이 가며 그들이 저절로 알아가길 바랄 뿐 내가 직접 건네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전하는 말은 그들의 걱정과 엄마에 대한 배려였을지라도 정작 내게는 다 같은 말이었다. 일종의 폭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태껏 나는 그런 말에 지배당하면서 엄마 곁에서 떠나지 못했다. 내 심장 깊은 곳으로부터 울리는 말과 뼛속에 새겨진 생각이 나를 그렇게 결심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을 벗어나 내게 지워진 어깨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을 것이다. 누군들 알까. 남들이 당연시 여기며 건네는 말과 행동엔 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옆에서 돌봐서 다행이라는 말속엔 그들이 걱정을 나누지 않겠다는 말로도 들리니까. 유독 장녀에게만 지워지는 짐은 혜택은 아들이, 딸에겐 덜 수 없는 짐만 남는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내 앞의 두려움을 걷어내고 싶다가도 한국에 사는 우리에겐 어려운 과제다. 당연시하는 태도와 말속에 상처받고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역할을 얼마나 견딜 수 있으며 내 자리를 언제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병원에 들어서면 아들, 며느리, 딸들이 늙고 노쇠한 어른들을 모시고 온다. 얼굴만 봐도 아들인지 딸인지, 며느리 인지 알만 하다. 당연한 결과다. 내 부모도 아닌데 짐을 지우고 있으면 좋은 표정과 말이 어렵다. 하물며 자식의 입장이라도 오랜 세월이면 쉽게 말할 수 없다. 역할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땐 어떨까 싶다. 자식들이 나로 인해 얽매여 일상의 일들을 해결하고 병원을 철마다 다니며 돌본다고 하면 늙어가는 입장에서도 미안하고 슬플 거 같다. 한마디로 나는 그런 짐을 져 주고 싶지 않다는 결론이 난다. 한편 바라보는 엄마도 마음 편하지 않겠구나 싶다. 누군들 그런 노후를 꿈꾸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건강할 때 자기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은 일찍 시작할수록 좋지 않을까.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하늘은 드넓고 푸르른 가을을 드러내고 있다. 슬피 우는 사랑하는 이를 남겨 두고 가는 마음은 어땠을까. 본인도 몰랐을 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보니 헛되다고 세 번을 되뇌던 성경말씀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었다. 어떤 생을 살 것인가는 선택이다. 그러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시간은 어디로 왔다 어떻게 마무리 져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잘 살다 간다는 게 어떤 것일까. 내 의지대로 살다 가는 인생이야말로 행복했다 할 수 있을까. 이모의 가는 길이 밝고 푸른 하늘빛처럼 하늘에서 지켜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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