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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 Oct 11. 2021

노을 사냥꾼

홍콩에서 머문지 백 하고도 서른 번째 날

여행은 떠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

   홍콩에서 보낸 134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2019년 5월의 하루로 돌아가 집을 나서려고 한다. 홍험 페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온 거리에 회색 필터를 씌웠다. 공기가 눅눅해 무거웠다. 하필 이런 날 도보 여행을 계획했다니, 가릴 데만 가린 듯 가볍게 입고 나왔는데도 하루 동안 흘릴 땀의 양을 생각하면 아득했다. 특히 바다 근처는 더욱 습해 내가 걷는 게 지상인지 수중인지 모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한국에 돌아가기 전 그동안 가보지 못한 센트럴의 카우키 레스토랑 그리고 압 레이 차우 지역에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씩씩하게 습기를 뚫고 나갔다. <Bad Blood>라는 락 노래를 재생했다. 제목은 무섭지만 멜로디는 청량하고 시원해 체감 습도를 낮추는 역할을 했다. 페리를 타러 가는 길은 홍콩에 산 지 네 달이 지나도 언제나 설레었다. 

   센트럴의 카우키 레스토랑에 가서 밥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사실 센트럴에 가려면 페리보다는 MTR이 훨씬 빠르다. 그렇지만 여행하기로 작정한 김에 뷰가 더 좋은 페리를 선택했다. 선착장에서 십여 분을 기다리고 노스 포인트 동네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먹구름은 낮게 깔려 바다의 색을 한층 진해 보이게 만들었고 빌딩은 높게 솟아 구름에 정수리를 살짝 넣었다.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페리 노선인 침사추이-센트럴 구간에서는 한 번에 카오룽의 경치나 홍콩섬의 경치 중 하나만 볼 수 있다. 그러나 홍험-노스 포인트 페리에서는 카오룽과 홍콩섬 둘 다 한눈에 볼 수 있다. 아트 바젤을 보러 갔던 완차이의 컨벤션 센터, 차이나 뱅크, IFC에 이어 카오룽에서 가장 돋보이는 ICC까지, 바다 한가운데에서 좌우 양쪽의 랜드마크가 모두 보인다. 그리고 그보다는 평범하지만 빌딩이 빼곡 들어차있는 노스 포인트의 뷰도 꽤나 멋지다. 침사추이-센트럴 구간 못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홍험과 노스 포인트가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그런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 

좌측이 홍콩섬 우측은 카오룽

노스 포인트의 전경


   노스 포인트에서 하선한 후, 아일랜드 노선 MTR을 타고 성 완 역으로 향했다. 트램을 타면 볼거리가 더 많지만 트램은 단거리에 더 적합하기 때문에 포기했다. 주린 배를 잡고 오르막길을 지나 카우키 레스토랑 앞에 갔는데 웬 일, 문이 닫혀있었다. 한국 갈 날은 얼마 안 남았고 센트럴에 또 언제 올지 모르니 상당히 아쉬웠다. 카우키를 먹으려다 실패한 적이 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카우키와 인연이 아닌가 싶었다. 주변 사람들이 맛이 별로라 했으면 미련이라도 없을텐데, 먹어 본 사람마다 맛있다고 평했다. 

   배고픈 게 참을 만해서 식사는 생략하고 바로 압 레이 차우로 향했다. 어드미럴티 역으로 가 연두색 노선인 사우스 아일랜드선으로 환승했다. 

   사우스 아일랜드선에 대해 들어보기만 했지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노선 전체에 역이 5개 밖에 없어 짧아 보이지만 역간 거리가 꽤 된다. 속도도 빠른 편으로 홍콩섬의 상단에서 남단을 14분 만에 가로지를 수 있다. 안돌은 사우스 아일랜드선 차량에는 특별한 볼 거리가 있다고 말해 줬었다. 끝 칸에 운전석 대신 유리 창문이 나있어서 운행 중에 창문으로 철로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지하철을 탔을 때 화장실이 급해 철로고 뭐고 마음 속으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게 해달라고 빌며 갔다. 

어드미럴티 역

물방울 무늬 조명도 사우스아일랜드 선만의 특징이다. 


   그 와중에 지하철 창문 너머로 화려하게 생긴 수상 가옥이 보여 사진을 찍어 두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유명한 점보 킹덤 레스토랑이었다. 홍콩 섬과 압 레이 차우 사이의 좁은 바다 위에 떠있는 곳이니, 이 수상 건축물이 보인다는 건 압 레이 차우에 거의 다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국 여왕 퀸 엘리자베스 2세, 존 웨인, 톰 크루즈 등 유명인을 포함해 3000여 만명이 식사를 하고 간 이 식당은 현재 코로나로 폐업했다. 가격대를 검색해보니 어차피 내 경제적 수준으로는 당분간 못 갈 곳이었다. 그래도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 사라지면 항상 아쉽다. 상황이 좋아져 다시 열 수 있길 바란다. 


압 레이 차우에서 무작정 걷기

   사우스 아일랜드 선 중 압 레이 차우 지역 안에 있는 역에는 레이 퉁 역과 종점인 사우스 호라이즌스 역이 있다. 이 날의 목적인 노을을 보기 위해서는 서쪽 해안이 더 적합하겠다 싶어 둘 중에 사우스 호라이즌스 역에서 하차했다. 역 이름을 번역하면 남쪽 수평선이 되는데, 역 이름 치고는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 멋진 노을을 보여줄 것 같은 지명이었다.

   역을 나와서는 무작정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압레이차우의 날씨는 홍험과는 달리 맑아, 노을이 잘 보일 것 같았다. 맑은 수준을 넘어 햇볕이 바다와 땅에 내려 꽂히는 듯했다. 그러나 햇볕이 공격보다는 격려로 느껴졌다. 이렇게 날씨가 좋으니 한번 즐겨보라는 듯 말이다. 이곳 바다의 윤슬은 내가 본 중 가장 하얗고 눈 부셨다. 


   사우스 호라이즌스 아파트 단지에 있는 바닷가 공원에는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오거나 혼자 운동 나온 주민들이 많았다. 관광객은 나 하나 뿐인 듯했다. 주거지인 다이아몬드 힐 동네에서 느꼈던 것처럼 외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때 쯤에는 그런 시선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요, 제가 외지인입니다. 그런 시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호감으로 다가와주는 홍콩 현지인들이 많았기 때문도 있다. 아무튼 그런 시선들은 내가 원래 속하지 않는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어 거기에서 더욱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압 레이 차우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라마 섬이 보였다. 두 번이나 방문했던 곳이라 반가웠다. 처음에는 내가 보고 있는 섬이 라마 섬이 맞나 긴가민가 했지만 풍력 발전소 기둥을 보고 확신을 가졌다. 그 앞에 있는 해수욕장에서 재밌게 논 기억이 떠올랐다. 보이는 김에 즉흥적으로 라마섬이나 갈까 싶기도 했다. 이 정도 가까우면 가는 배편이 반드시 있을 것 같았다. 

   구름은 예쁘고 동네는 조용하고 주민들은 여유를 즐겨 전반적으로 동네 분위기가 평화로웠다. 아파트 단지의 어떤 놀이터에는 무려 오션 뷰를 가진 그네가 있었다. 바다를 보며 타는 그네라니, 압레이차우 아이들은 꽤나 괜찮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습해서 그런지 구름이 어디를 봐도 굉장히 많았다.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착용하니 보이지 않던 멀고 작은 구름까지 보였다. 노출을 낮추니 사진에도 담겼다. 가까운 구름과 멀리 있는 구름의 모습이 서로 다른 곳에 속하는데 우연히 하나의 시야에 겹쳐 들어온 듯한게, 왜인지 모르게 짜릿해 한동안 가만히 서서 응시했다. 

노출을 낮추어 실제보다 어둡게 나온 사진


   압 레이 차우의 서쪽을 어느 정도 둘러봤는데도 일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압 레이 차우는 서쪽에서 동쪽까지 도보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섬이다. 그렇지만 나중에 찾아보니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섬이다. 돌아다닐 때도 여느 홍콩의 지역처럼 아파트가 많이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압레이차우의 분위기는 대충 파악했고 멋진 하늘도 즐겼으니 페리를 타고 홍콩 섬의 남쪽으로 넘어가 새로운 곳에서 일몰을 보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최대한 바다를 볼 수 있는 길로 페리 선착장에 갔다. 

구멍에 쏙 들어온 버스


강렬한 통통배의 기억


   대체 뭘 의미하는 건가 싶은 표지판을 가진 압레이차우 풍차 공원을 거쳐 에버딘 지역으로 갈 수 있는 페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가 페리 선착장이라고? 'To Aberdeen'이라고 적힌 팻말을 보니 잘못 찾아온 건 아니었다. 빨강, 초록, 노랑, 파랑. 원색 레고로 조립해 만든 것 같은 이 작고 귀여운 방 한 칸이 페리 선착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니! 내 머릿속의 페리 선착장은 센트럴과 침사추이의 페리 터미널 같은 곳이었다. 센트럴 페리 터미널은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선창이 열 개나 있는 대형 터미널이다. 물론 운행 구간도 짧은 이 곳에 그 정도 규모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방 한 칸의 규모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게 내가 탈 '페리'라니 한술 더 뜨는 광경이다. 내 머릿속의 페리는 센트럴과 침사추이에서 타는 스타 페리 같은 거였다. 스타 페리는 두 개의 층을 가지는 큰 배로 규모는 한강 유람선과 비슷하다. 한 층에는 못해도 칠십 명은 거뜬히 수용할 넉넉한 공간이 좌우로 길게 나있다. 그런데 이 미니 페리는 열댓 명 정도 들어가면 가득 찰 것 같았다. 게다가 나무로 만들어져있고, 천장은 플라스틱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동시에 쾌감이 있었다. 이 낯설은 모습의 선착장과 페리는 기존에 내 머릿속에 있던, 영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홍콩의 이미지에 딱 들어 맞았다. 가장 현지스러운 모습이었다. 선착장과 페리 뿐만 아니라, 배경이 되는 모든 요소들이 그랬다. 날은 흐렸고, 산과 바다가 모두 보였으며 고층 빌딩은 구름을 뚫고 바다에는 페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홍콩의 외적인 모습이 압축되어 모두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홍콩을 누비고 다닌지 백 하고도 서른 번째 날인데도 새롭고 매력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새로운 모습들은 중구난방 식이 아니며 정체성은 유지한 채 다양하게 표현된다. 이 나라는 대체 언제까지 매력을 발산할텐가?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더 있다는 믿음이 생겨서, 이 작고도 넓은 나라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여전히 그리워한다.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페리 하나가 선착장을 떠나서 다음 페리를 조금 기다리다 탑승했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페리의 내부를 뜯어봤다. 배의 구조물은 나무로 만들어져 투박한 느낌을 주었으며 운전석은 조촐하여 버스의 운전석을 떠오르게 했다. 어떤 사람들이 페리를 주로 타는지 사람 구경도 했다. 관광객은 나 하나인 것으로 보였다. 


   때가 되자 페리가 출발했다. 페리를 탈 때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다른 페리들은 승차시간이 최소 십 분 정도는 되는데 이 통통배는 승차시간이 고작 삼 분이라 한 번 뿐인 이 기회를 놓칠세라 모든 장면들에 모든 감각을 바짝 집중했다. 눈을 크게 뜨고 앞뒤와 좌우를 바삐 살폈다. 영어 단어 대신 광둥어가 보이는 지역일수록 영국 식민의 영향을 덜 받은 광동 분위기가 나는데 페리에서 보는 압 레이 차우의 전경도 그랬다. 어떤 건물에는 '합화지산'이라는 문구가 붉은 색으로 거대하게 적혀 있어 풍경의 중심이 되었고, '마, 여기가 홍콩이다!'하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압 레이 차우를 생각하면 통통배와 이 문구가 중심이 되는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시각과는 달리 청각에는 많은 것을 느끼려 굳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모터가 덜덜거리는게 귀 뿐만 아니라 온몸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승차감이 상당히 별로였다. 근데 잠깐 타니 불편하기보다는 재미있는 요소였다. 


노을 사냥에 시동을 걸고

   감상과 사진 찍기를 반복하다 보니 금새 에버딘이었다. 오기는 왔는데,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 꼭 하고 싶었던 일은 카우키에서 국수 먹기, 노을 보기, 그리고 페리 타기였다. 국수 먹기는 이미 물건너갔고, 미니 페리는 탔다. 이제 노을만 보면 되는데 어디서 봐야할 지는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 걸었더니 에버딘에서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선착장들이 보였다. 예상했듯이 라마 섬으로 갈 수 있었다. 포 토이 섬으로 가는 배편도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김에 갈까 싶었지만 이미 꽤 늦은 오후였기 때문에 돌아오는 배편까지 생각하면 시간이 좋지 않았다. 그냥 도보로 갈 수 있는 곳만 목적지 후보에 올리기로 했다. 그 때는 홍콩에 좀 더 길게 머무를 줄 알고 나중에 써먹기 위해 페리 시간표를 찍어 두었다. 어쩌다 보니 아쉽게도 이 날이 홍콩에서의 마지막 여행이 되어, 찍어둔 시간표를 활용하지 못했다. 


   사실 페리에서 내린 곳도 충분히 서해안에 속해 있어 노을이 보일 것 같았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더 서쪽으로 가면 더 멋진 노을이 날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구글 지도를 켜니 근처의 워터폴 베이 공원(Waterfall Bay Park)이 눈에 띄었고, 그 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구글 지도에 녹색과 파란색이 함께 있는 곳에 가서 실망한 적이 없다. 몇 달간 쌓은 여행 경험을 통해 얻은 혜안이다. 

   검색해보니 버스로 십 분 정도면 워터폴 베이 공원 근처로 이동 가능했다. 버스정류장까지 조금 밖에 걷지 않았지만 그 짧은 새에 이 곳이 주거 지역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장기 게임장(?) 덕분이었다. 아파트 단지 근처의 공원에 갈 때마다 광동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봤었다. 주로 야외에서, 날씨가 더워 난닝구를 가슴팍까지 돌돌 말아 올리고 장기를 두거나 삼삼오오 모여 다른 할배들의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서울 도심의 공원에서 누가 상의를 올려 배를 드러내고 있으면 보통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 주변을 피해가고 싶을거다. 그러나 날씨가 찌도록 더운 홍콩에서는 할아버지들이 배꼽티로 변형을 해서 입는 일이 흔했다. 홍콩에 있는 동안 혼자 만들고 증명한 '광둥 할배 법칙'의 일부이다. 물론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곧 적응이 되었다. 할아버지들이 크롭 탑에 항상 무표정으로 대낮의 여유를 즐기는 광경이 그립기도 하다.

   여러 장기 게임장을 보아왔지만 햇빛 때문에 덥지 않게끔 지붕까지 달린 장기 게임장은 흔치 않았으며, 외벽에 멋진 디자인이 새겨져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에버딘의 장기 게임장은 지붕도 있고 벽화도 멋졌다. 에버딘의 할아버지들은 꽤나 괜찮은 복지를 누리고 계셨다. 지붕 덕분에 덜 더웠는지 상의도 돌돌 말아 올리지 않으셨다. 

페리 선창인지, 수산물 시장인지 닫혀 있어 알 수 없었지만 천장의 붉은 조명과 장식품, 그리고 대문에 붙일 수 있는 대로 붙인 춘축들이 현지 느낌이 물씬 나 한 장 찍어보았다. 


   구글 지도에서 알려준대로 어렵지 않게 버스를 탔고, 차창 너머의 바다와 근처 동네를 관찰하며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 한 건물이 눈길을 끌어당겼다. 문과 창문의 구조 그리고 춘축으로 봤을 때 아파트로 추정된다. 직사각형 단위로 일사불란하게 정렬되어 있는 누구들의 보금자리에서 시각적으로 쾌감을 느꼈다. 란터우 여행기에서도 말했듯 이후 홍콩 주거방식의 문제점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내가 그들의 주거지가 그저 보기에 예쁘다고 즐거워해도 되는 것인지 반성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해안가를 따라 길게 위치한 워터 폴 베이 공원 뒤로 와 푸 아파트 단지(Wah Fu Estate)가 상당히 크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 근처의 와 푸 쇼핑센터 앞에서 하차하여, 주거 단지를 지나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어딜가나 보이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몇 군데, 해당 지역만의 현지 음식점 몇 군데가 함께 있는 게 홍콩의 여느 주거 단지 같았다.


   다만 각 지역마다 지역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건물의 색감은 조금씩 다르다. 쨍한 색의 건물이 많은 곳도, 유독 흑백색의 건물이 많은 곳도 있다. 와 푸 단지의 건물들은 내가 본 중 파스텔 톤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주차장은 민트색과 분홍색 칠을, 아파트은 연분홍, 연노랑, 연두색의 칠을 입고 있었다. 건물 뿐 아니라 길거리의 벤치 마저 분홍색과 보라색이었다. 그것이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오브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요소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민들은 분홍 보라색의 벤치를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할지 한두 번 이후로는 눈에 띄지도 않는 일상의 배경 중 일부로 간주하게 될 지 궁금했다. 홍콩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누구나 그렇듯 해외 체류에 대한 후유증이 조금 있었을 때(이 년이 지금도 완치는 아닌 것 같지만) 예쁜 색감의 건물이 많이 그리웠다. 

와 푸 단지의 한 동. 아파트 팻말이 작고 군더더기 없다. 심지어 팻말이 저층에 위치한다. 한국의 아파트에 브랜드명과 동이 높은 곳에 대문짝만하게 적혀있는 것과 대조된다. 

와푸 단지의 아파트 중 하나인 이 연두색 건물은 내부가 정사각형 모양으로 뻥 뚫려있다. 하늘에서 보면 정사각형 모양의 액자식 구조를 가진다. 홍콩에서는 이런 건물 구조를 종종 볼 수 있다. 


   사람 사는 동네를 거쳐 워터 폴 베이 공원에 도착했다. 바다는 넓게 트여 있었고 구름 덩어리는 지나가는 배를 잡아먹을 듯 커다랗게 뭉쳐 있었다. 햇빛이 강렬해 구름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힘있었다. 구글 지도 위 녹색과 푸른색 조합이 또 한 번 승률을 굳건하게 지켜냈다. 두어 시간 전 마주했던 라마섬이 여기에서는 더 크게 보였다. 라마섬이 보일 때마다 쌀국수가 생각났다.


   충분히 감상하고 해안가를 따라 조금 더 걸어 워터폴 베이 공원의 '워터폴'을 맡고 있는 폭포를 보러 갔다. 사실 폭포가 있는 곳으로 진입하는 곳이 막혀있었다. 그렇지만 폭포 앞에 이미 사람이 있었고, 통제가 너무 허술하게 되어 있기에 넘어 가기로 결정했다. 마침 현지 주민들이 아이를 데리고 같은 곳을 넘고 계셔서 안심하고 같이 넘었다. 내가 외지인 같은지 어디서 왔냐고 먼저 물어와주셨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내용으로 말이 이어지고, 유쾌한 대화가 조금 더 오갔다. 하루종일 혼자 여행을 다녀 주변을 찍기만 했지 나를 찍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따듯하게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하셨다. 폭포 앞에서 하루 중 처음으로 포즈를 취했다. 고마워서 나도 일행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다. 그때 찍힌 내 모습을 보면 얼굴은 꼬질꼬질하지만 상당히 즐거워 보인다. 


   폭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시원함을 느낄 정도로는 충분했다. 폭포는 해안선의 움푹 파인 땅에 위치해 있었다. 움푹 파인 땅 위에는 자갈이 많았고 그 위로 파도가 세지 않게 쳤다. 

왼쪽에 보이는 와 푸 아파트 단지

하루종일 마주 본 라마섬


   이 곳만의 특별한 점은 자갈의 색이 정말 다양했다는 것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다른 바다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붉은색 돌도 보였다. 


오래토록 바라던 걸 이루었을 때

   저녁 여섯 시 즈음. 워터폴 베이 공원도, 폭포도, 그 앞의 바다도 충분히 봤는데 여전히 일몰까지 시간이 남아있었다. 내가 기다리는 새빨간 노을을 보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근처에 머무르다 다시 와 노을을 볼까 고민했지만 이 귀중한 시간에 실내에 들어가 있기 싫었다. 구글 지도를 살펴본 뒤 한 번 더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지는 조금 더 위에 있는 사이버포트 바닷가 공원(Cyberport Waterfront Park)으로 정했다.  

   이름 때문에 이 지역이 전부터 항상 궁금했다. 그 근방을 포함한 지역을 텔레그래프 베이(Telegraph Bay)라 칭하는데 무슨 지명의 뜻이 '전보'란 말인가. 나중에 알고보니 19세기 후반 해외로 통하는 전신 케이블이 설치된 지역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에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Telegraph'에 속한 'Cyberport'라는 독특한 이름의 정체를 밝히러 간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했다.

   도보로는 이십오 분, 버스로는 칠 분 정도 걸린다 해서 당연히 버스를 탔다. 일몰 시간대의 일 분 일 초는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탈하게 잘 가다 내리기 직전에 갑자기 교통 체증이 심해졌다. 버스가 오도가도 못했다. 긴장되어 식은 땀이 났다. 하루종일 노을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버스에 갇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걸어올 걸. 도무지 버스가 움직이지 않아 기사님께서 그냥 내려주셨는지 교통 체증이 자연스럽게 풀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리자마자 뛰었다. 

   높은 빌딩들을 지나 공원에 발을 디뎠을 때 우와. 감탄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 나왔다. 공원은 그래픽처럼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노을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 '가득'.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온 하늘이 내게 맞게 왔다고, 오늘의 여정은 모두 지금을 위한 게 맞다고 말해주었다. 공원 자체에도 볼거리가 많았지만 일몰에 집중하고 싶어 공원을 가로질러 바다 쪽으로 달려갔다. 


   노을을 관람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았다. 바다와 닿아 있는 제방이었다. 제방 끝에는 1.5 미터 폭의 공간을 남겨놓고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지만 모두 아무도 바리케이드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고 넘어가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들과 노을 보러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나도 그들 중 일부가 되기로 했다. 편히 앉을 수 있었고 폭이 넓어 무섭지 않았다. 노을과 나 사이에 아무런 방해물이 없어 좋았다. 

노을을 감상한 자리


   자연은, 그저 경이로웠다. 이곳에 나와 바다, 태양, 구름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전달하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들은 웅장하고 장엄해서 나와 내 머릿 속의 사소한 고민 같은 것은 잠시 지워버렸다. 강한 빛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태양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시력이 걱정될 정도로 말이다. 태양은 하나고 언제나 그대로인데 언제 어디에서 보는지에 따라 수많은 모습을 가지는 것이 신기로웠다. 구름 덩어리들은 작은 물고기들이 모여 만드는 큰 물고기 형상처럼 큰 세력을 형성해 하늘을 지배하려드는 듯했다. 위에서도, 양 옆으로도, 앞으로도 트여 있는 모든 곳에 흐드러져 시시각각 새로운 형상을 만들었다. 바다만이 조용히 제 자리에만 있었다. 그렇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살아 있지 않은 것들에서 이토록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네댓 달 동안 집착하듯이 노을을 찾아다녔고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홍콩에서 체류한 경험을 마치고 운이 좋게도 다른 멋진 나라들을 길게는 아니지만 여행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리고 이 곳 사이버포트에서 본 것보다 더욱 화려한 노을을 보았다. 그때도 물론 마음 깊이 아름다움을 느꼈지만, 이 곳만큼의 울림은 얻지 못했다. 케이블카를 올라가서 보는 경치보다는 힘들게 등산한 후에 보는 경치가 더 짜릿하고 기억에 오래 남듯이 몇 달 동안 노을에 집착하고, 하루 동안 쫓아다니며 이곳 저곳 돌아다닌 것이 한몫 했을거라 생각한다. 성취감이 작용했다는 거다. 또 오롯이 혼자서 아름다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어디에도 분산시키지 않고 모두 흡수했다. 분명 살가죽이 내 몸과 외부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데, 그와 관계없이 내 몸이 모두 개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찌릿함은 잊을 수 없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 하늘을 훑고 있는데 현지의 커플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광둥어를 하지 못하니 자연스레 어디서 왔냐는 스몰 토크로 이어졌다. 내가 속한 곳에 그들도 인연이 있어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렇게 된 김에 노을을 배경으로 나도 한 컷 찍어달라 부탁하며 스마트폰을 내밀었는데, 본인들의 좋은 카메라로 찍어 보내주겠다 하셨다. 노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바로 스마트폰으로 전송해 이메일로 나에게 전달해주셨다. 폭포 앞에서 만난 분들도 그렇고 현지인과 기분 좋게 교류한 덕분에 하루가 더 풍성해졌다. 

   노을에 환장해 바닷가로 뛰어 갈 땐 몰랐지만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사이버포트는 상당한 부촌이었다. 그래서 공원도 관리 상태가 좋았던 거다. 자명한 사실이지만, 서울보다 집이 더 귀한 홍콩에서 오션뷰 아파트는 당연히 비싸다. 그런데 사이버포트 아파트는 고급 중에서도 고급이었다. 특히, 아파트의 헬스장이 외부에서 보이는데 미래 도시의 헬스장인 줄 알았다. 유독 압레이차우와 와 푸 아파트 단지가 전통적인 홍콩 건물 양식이라 사이버포트에서 비현실감을 조금 느끼기도 했다. 궁금해서 가보려고 해도 보안이 철저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부자 동네에 들어온 것 같아,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갈 수 없는 곳을 침입한 것은 아니다. 사이버포트 바닷가 공원은 개방된 시설이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주민들도, 나처럼 노을을 보러 온 사람들도, 낚시를 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다. 


가장 자유로운 하루

   길고도 짧은 일몰이 끝나고 어둑어둑해졌다. 집에 돌아가는 동안을 유예기간 삼아, 비일상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어찌 보면 홍콩에 체류한 동안 전체가 비일상이었지만 말이다).

   스마트폰의 배터리를 아껴 썼는데도 간당간당했다. 처음 와보는 곳에 있었고 근처에는 지하철역도 없었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꺼진다면 미아 신세를 면치 못할 예정이었다. 홍콩에서 구글 지도가 없는 나는 그냥 길거리 위의 바보였다. 조금 긴장한 채로 버스 정류장을 찾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홍콩의 버스 시스템은 적어도 내가 머무르던 2019년에는 그닥 정확하지 않았다. 구글 지도가 틀린 시간을 알려줄 때도 많았고, 정류장이라고 한 곳에 가보면 막상 버스가 정차하지 않은 적도 많다. 라마 섬에 간 날 경험했듯 말이다. 구글 지도의 버스 정보가 조금 멍청하기는 해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긴 했다. 어찌저찌 카오룽의 서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해 홍험으로 돌아왔다.

   휴, 긴 여행 끝에 살아 돌아왔다. 하루종일 굶은 배를 결국 익숙한 맥도날드로 달래고 이틀 같던 하루를 사진으로 돌아보며 오랫동안 곱씹었다. 가장 자유로운 하루였다. 가장 가볍고 편한 차림으로, 최소한의 준비물만 챙겨 맨몸으로 홍콩섬을 누볐다. 혼자이니 모든 의사결정도 스스로 내렸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해진 것이 없었고 그냥 끌림을 주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내가 정한 목적지에서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곳들은 있던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내게 화답해 주었다. 화려하지 않아 사람들이 덜 찾는 곳은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왜곡 없이 볼 수 없어 좋았고, 화려한 것을 쫓아간 곳에서는 기대한 것보다 더 큰 에너지를 받아 왔다. 

   홍콩에서 이 날 이후로 나흘만을 더 머물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보다 일주일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일찍 돌아왔다. 노을 사냥은 마지막이 될 지 모르고 떠났지만 홍콩에서의 마지막 여행으로 적절했다. 체류 초반에 여행에 무지했던 때를 거쳐 조금 발전했을 때이다. 나는 홍콩을 여행하는 방법에 보다 능숙하게 되었지만 여행의 내용에 익숙해진 적은 없다. 현지의 문화와 자연은 언제나 나에게 보여줄 것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홍콩에 다시 돌아가더라도 언제나 새롭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한국에서 홍콩을 방문하는 것은 제주도 여행처럼 어렵지 않아 곧 다시 돌아갈 줄 알았다. 상황이 그렇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홍콩의 모습이 오래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한다. 여건이 될 때 언제라도 찾을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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