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어설픈 짝사랑

‘지바겐’이 비추는 언어적 자화상

by 스카웃

‘지바겐(G-Wagen)’이라는 차종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메르세데스-벤츠 사의 G-Class 차종을 일컫는 이 명칭은 사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기묘한 언어적 하이브리드다. 본고장 독일에서는 ‘게 클라쎄(G-Klasse)’, 영어권에서는 ‘지 웨건(G-Wagon)’이라 불린다. 독일어 ‘Wagen’은 독일식으로 읽으면 [바겐], 영어식으로는 [웨건]이 되는데, 한국은 알파벳 ‘G’는 영어식으로, ‘Wagen’은 독일식으로 취사선택해 ‘지바겐’이라는 국적 불명의 조어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혼종성은 브랜드명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독일 본토 발음에 충실한다면 ‘메어체데스 벤츠’에 가깝겠지만, 우리는 앞의 Mercedes는 영어식 발음에 기반한 ‘메르세데스’로, 뒤의 Benz는 독일식 발음을 고수한 ‘벤츠’로 분절하여 정착시켰다. 이는 우리가 외래어를 수용할 때, 우리 언어 체계 안에서 일관된 기준을 세우려는 주체적 노력이 부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본래 외래어 수용에는 두 가지 원칙이 존재한다. 하나는 외국어를 자국어의 음운과 표기 체계로 완전히 번역하여 관습화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원어의 발음과 맥락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식이다. 일본 교토의 ‘기요미즈데라’를 ‘청수사’라 부르고, 중국의 ‘베이징’과 ‘덩샤오핑’을 ‘북경’과 ‘등소평’으로 읽는 방식은 전자에 해당한다. 이는 한자를 공유하는 입장에서 이해를 도울뿐더러, 외래문화를 자국 언어 질서 안으로 포섭하려는 주체적인 문화적 선택이다.


중국의 글로벌 브랜드 번역 사례는 이러한 원칙의 실천을 잘 보여준다. 코카콜라(Coca-Cola)는 단순한 음차를 넘어 ‘입에 맞고 즐겁다’는 뜻의 ‘가구가락(可口可乐, 커 코우 컬 러)’으로 재탄생했다. 스타벅스(Starbucks) 역시 원어의 의미와 발음을 절묘하게 결합한 ‘성파극(星巴克, 씽 바커)’으로 정착했다. 이들은 외래어를 무리하게 원어 그대로 재현하려 애쓰지도, 제3의 언어를 경유해 중계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국어의 의미 체계 안에서 언어적 주체성을 지키며 외래어를 성공적으로 재구성한 예시다.


한편 북한은 외래어 수용에 있어 철저한 ‘원어 중심주의’를 견지한다. 폴란드를 ‘뽈스까(Polska)’, 헝가리를 ‘마쟈르(Magyar)’라 부르는 방식은 매개 언어인 영어를 거치지 않고 해당 언어의 자칭(Endonym)을 존중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를 무조건 이상화할 필요는 없겠으나, 최소한 외래어를 어떤 원칙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철학이 존재한다는 점만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는 오늘날 한국의 외래어 사용이 이 두 원칙 중 어느 쪽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국어의 질서로 외래어를 소화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철저한 원어 존중의 태도를 유지하지도 못한다. 그 틈에 자리한 것이 바로 ‘지바겐’ 같은 기형적인 혼성 발음이다.


흥미로운 점은 전문성을 자처하는 커뮤니티일수록 이러한 왜곡을 오히려 규범 삼는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국적의 F1의 스타 드라이버 ‘Max Verstappen’은 쿠팡플레이 공식 해설에서도 본토 발음인 [막스 페어슈타퍼]가 아니라 영어식 발음이 섞인 ‘막스 베르스타펜’으로 불리며, <F1 더 무비> OST의 작곡가이자 독일의 영화 음악 거장 ‘Hans Zimmer’ 역시 독일식 발음인 [한스 침머] 대신 ‘한스 짐머’로 통용된다. 유럽어 성명에는 영어식 발음을 관대하게 허용하면서도, 정작 영어 단어 ‘mechanic’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메카닉’ 대신 ‘미케닉’이라 발음해야만 전문가인 양 행세하는 식이다.


가령 일본인이 음운 체계상 ‘김치’를 정확히 발음하기 어려워 ‘기무치’라 표현하는 경우는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문화에 더 익숙하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한국의 정체성이 담긴 음식을 굳이 ‘김치’가 아닌 ‘기무치’로 부른다면, 이는 더 이상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매개 언어를 기준 삼는 인식의 오류가 된다. 지금 우리의 외래어 사용 습관이 바로 그러하다.


이 혼란의 밑바닥에는 미국식 영어를 ‘절대적 표준’으로 숭배하는 위계적 태도가 깔려 있다. 영어는 존중의 방식이 아니라 모든 외래어를 걸러내는 중계 언어로서 군림하며, 다른 언어들은 그 위에서 임의로 조합된다. 이는 자국어 중심의 번역도, 원어 존중도 아닌 그저 편의적이고 위계적인 언어 종속의 결과물일 뿐이다.


언어는 단순히 소리를 옮기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틀이다. 지금 우리의 외래어 사용 습관은 주체적 번역도, 원어 존중도 없는 정체성의 부재를 드러낸다. 미국식 발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도 그 기준조차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하는 이 혼란 속에서, 한글은 외국어를 질서 있게 소화하는 문자가 아니라 국적 불명의 소리를 임시로 받아쓰는 수동적인 도구로 소모되고 있다.


외래어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타자의 문화를 어떤 태도로 마주하는지를 보여주는 언어적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세련된 본토 발음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우리말의 질서를 세우고 지켜내려는 언어적 자존감과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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