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남자 수강생은 우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올해 스물여섯 먹은 차재건이라고 합니다. 고향은 강릉인데 학교 때문에 부산에 와 있습니다. 현재 OO대학교 문화 콘텐츠 창작학과 3학년까지 마쳤고, 지금은 휴학 중입니다. 피자 가게에서 하루 종일 도우 돌리다가 얼마 전에 희망퇴직 했습니다. 총알도 두둑이 챙겼으니, 복학하기 전까지 영상화를 목표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할 생각입니다."
재건의 능청스러운 소개에 몇몇 수강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미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방금 말씀하신 이름은 필명인가요?"
"아! 아닙니다. 차재건은 실명이고요, 필명은 차누아르입니다. 누아르 앞에 제 성인 차를 붙인 겁니다.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누아르는 영화 예술의 한 장르이자, 검다는 뜻의 프랑스어이기도 합니다. 말했다시피 저는 소설을 써서 영상화하고 싶은데, 이야기는 아직 구상 중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목적은 오로지 돈이기 때문에, 그동안 흥행했던 소재들을 짬뽕시켜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짬뽕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기 때문에, 누아르라는 필명을 만들어봤습니다. 저는 술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여러분들과 신나는..."
"잠깐만요."
우미가 재건의 말을 끊었다. 그는 자기 말에 고양되어서 팔을 높이 쳐들었다가, 그녀의 제지에 그대로 멈췄다. 재건은 얼른 팔을 내리고 우미를 쳐다봤다.
"다른 작가님들도 기다리고 계시니까, 개인적 취향은 천천히 알아가는 걸로 합시다."
"네!"
그가 팔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앉으셔도 돼요."
우미의 부드러운 제안에 그는 멋쩍어하며 자리에 앉았다.
"파이팅 넘치는 소개를 해주신 차누아르 작가님. 아직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도 작가님 말씀처럼 짬뽕시킬 건가요?"
"네, 짬뽕을 푸흡."
재건은 말하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재미나는지 얼굴을 구겨가며 연신 키득댔다.
"죄송합니다. 짬뽕이란 말이 너무 웃겨서, 어떻게 짬이란 단어와 뽕이란 단어를 합칠 생각을 했지. 하하하하."
이제 그는 웃음을 참을 생각도 않고, 고개를 뒤로 젖혀가며 폭소했다.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보거나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와중에 구진도 이 폭소에 동참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와하하, 니 웃기네. 아! 반말하면 안 되지. 그 누아르인가 뭔가 하는 작가님, 님 좆나게 웃기네요."
이쯤 되자 우미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만"이라고 소리쳤다. 재건과 구진이 웃음을 멈췄다. 우미는 구진을 보며 말했다.
"반말이었음을 인지하고 존댓말로 변경한 건 정말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글 쓸 때는 얼마든지 사용해도 됩니다. 아시겠죠?"
"아이고, 제가 또 잘못을. 죄송죄송합니다. 워낙 거칠게 살아온 놈이라 이해 좀 해주십쇼.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우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앙다문 채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재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대화가 끊겼었네요. 차누아르 작가님 얘기를 들어보면, 흥행했던 장르나 소재를 융합한다는 의미 같은데,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재건은 장난기를 거두고 헛기침을 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네. 사실 그동안 성공한 장르나 소재가 너무 많아서 그게 계속 바뀝니다. 요즘은 인공지능 관련 이야기가 좋을 것 같긴 한데, 발전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라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 기술이 반영된 레퍼런스 작품도 많이 없고요. <케데헌> 같은 스토리 라인이 대중적 흥행을 보장해 주기는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썼다간 아류작 소리 들을 게 뻔하고. 아니면 공포 장르나 좀비물에다가 이것저것 버무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정 안 되면, 이제는 사양 소재인 히어로물에 이질적인 요소를 접목해서 변주한다든지..."
"잠깐만요."
우미가 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재건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연신 자기 손을 주물렀다. 우미가 눈을 뜨지 않자, 그가 말을 걸었다.
"저기, 선생님."
그의 부름에 우미가 감았던 눈을 떴다.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흥행이나 성공만을 목표로 글을 쓰는 게 과연 옳은 방법일까요? 작가님은 글을 쓰는 목적이 오직 돈이라고 하셨죠?"
"네."
"돈 버는 덴 많은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글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하시죠?"
"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다른 걸 배우면 되잖아요. 글쓰기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걸로요."
"그런 게... 뭐가 있죠?"
"많죠. 세상엔 얼마나 많은 배움이 있는데요. 작가님은 피자 가게에서 일한 경력도 있으시잖아요. 아니면 기술 자격증을 따서 취업해도 되고요."
이 말에 재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들뜬 기운도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우미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왜요? 그렇게 돈 벌긴 싫어요?"
"네."
"왜죠? 과정은 달라도 목적은 같잖아요."
"창작과 노동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르죠?"
"다릅니다. 창작은 예술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격앙된 감정이 실려있었다. 우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톤을 낮춰 차분하게 말했다.
"작가님 말씀처럼 노동과 예술은 현상적으로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하지만 피자가게에서 도우을 반죽하는 일과, 글을 써서 창작하는 일 사이에 우월과 열등의 논리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됐든, 시간과 열정을 들여 몰두한다는 건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선 대화에서, 우미가 재건의 말을 끊고 대안을 제시하면, 그는 순순히 수긍했었다. 둘을 바라보던 수강생들은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재건의 표정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경멸하는 눈초리로 우미를 내려다봤다.
"그건 아니죠. 막말로 길거리 청소부와 법원 판사가 같다고 생각하세요? 세상 모든 직업에는 우열과 서열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이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직업이 곧 그 사람입니다."
우미는 이 대화가 더 번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대강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때 재건이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 열린 분 같았는데, 이제 보니까 꽉 막히셨네요."
"그래요? 어떤 점이 그렇죠?"
"뭐 말하는 게, 별반 다를 바가 없네요."
"누구랑요?"
이 물음에 재건은 대답하지 못하고, 위아래 치아를 반복해서 부딪혔다. 그의 볼과 턱이 움찔움찔하는 게 보였다. 잠시 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지겹다는 투로 말했다.
"됐습니다. 그만하시죠."
우미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글 써서 돈 버는 게 쉽지 않다는 거, 누아르 작가님이 누구보다도 잘 아실 거예요."
재건은 고개를 돌리며 콧김을 뿜었다. 우미가 말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건, 그만큼 글이 쓰고 싶고, 글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아닐까요? 그런 인정욕구가 성공이나 돈이라는 가치로 잘못 환산된 게 아닐까요?"
재건의 눈에 서려 있던 독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는 아주 잠깐,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곧 그런 자신을 거부라도 하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글 써서 돈 많이 벌 겁니다. 절대 포기 안 합니다!"
재건이 스스로 기운을 차리자, 우미는 팔을 들어 파이팅하는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좋아요! 우리 함께 돈 많이 벌 수 있는 글을 연구해 봅시다! 멋진 소개 들려주신 우리 차누아르 작가님께 박수."
박수 소리가 구원 때보다 더 컸다.
재건 옆에 앉은 태윤은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 박수 소리가 멎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증폭되었다.
일정한 속도로 밀려드는 소리가 태윤의 귓속을 점령하자, 청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과 자극이 희미해져 갔다. 급기야 박수 소리마저도 완전히 소거되었다.
그의 내부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울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