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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향기, 그림자

15.

by 김빗


"태윤이도 손뼉 쳐볼까? 선생님이랑 같이 손뼉 쳐보자. 짝짝짝, 짝짝짝. 왜? 태윤이는 손뼉 치기 싫어? 친구들은 다 손뼉 치는데."



'그래, 이 목소리. 유치원 선생님의 목소리. 기억난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까.

눈을 맞추려 하면, 고개 숙여 피했으니까.

친구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주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럼, 그때 난 무엇을 봤지?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붉은 벽돌 건물 마당에 진 짙은 그림자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뒤를 돌아봐도, 태양 빛을 흡수한 세상은 어디서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대한 그림자 가운데에 오도카니 멈춰 서서 몸을 떨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아득히 솟은 높은 첨탑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무서우리만치 크고 높은 교회 건물은, 나를 속박시켜 놓고 서서히 몸을 기울여 짓누를 것만 같다. 십자가와 그림자가 만나는 지점에서 나는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도망가야 하는 데 갈 수가 없다. 선생님이 나를 그림자에서 끄집어내 교회 지하로 데려간다. 건물 내부로 집어삼켜진 나는, 위액에 짓이겨진 음식물처럼 무력하다. 누구의 얼굴도 볼 수 없고, 누구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이 어릴 적 기억은, 성인이 된 후 꾸게 되는 악몽과 흡사하다.


꿈은 나를 잡아먹는다. 도망치고 싶지만, 갈 곳이 없다.

어디를 가도 꿈속이고, 어디를 가도 둘러싸여 있다.


나는 꿈 무대의 유일한 관객이 되어, 주인공이 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관객이 이야기에 관여할 수 없듯이 나는 꿈속 나에게 다가갈 수 없다.


영화관에선 눈을 감거나 귀를 막아, 특정 장면을 회피해 보겠다는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꿈속에선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마주하고, 모든 것을 경청해야 한다. 그 어떤 끔찍한 감정이 휘몰아치더라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꿈이고, 그것이 세상이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다. 나는 그들이 만든 원 안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다. 이건 위험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라는 것을.


눈 코 입이 없는 사람이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태윤이도 같이 손뼉 쳐야지. 엄마 아빠가 보고 계시잖아."


텅 빈 얼굴에서 선생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아빠를 보고 있다가, 선생님의 말에 반응하여 나를 본다. 엄마의 얼굴에 수치심이 피어난다. 그 얼굴에서, 집에 가면 때려주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빠가 나를 보고 있다. 한심한 종자를 보는 듯한 저 눈빛. 아빠는 내 존재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먼 곳을 보고 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나를 그리고 우리를 보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도 나를 보고 있다. 그래, 저곳이다. 내가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곳. 나는 할머니에게 간다. 할머니가 나를 안아준다. 그러자 사람들이 할머니를 노려본다. 할머니는 노려보는 사람들을 본다. 할머니가 나를 놓고 뒤돌아서 간다. 할머니가 앉아 있던 자리에 틈이 생긴다. 나는 그 틈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빈틈을 메운다.


엄마, 아빠, 선생님, 할아버지. 그들이 내 어린 영혼을 조여 온다. 나는 도망갈 수 없다. 끝끝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관객인 나는, 배우인 나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관객은 배우가 잡아먹히는 카니발리즘의 의례를 지켜봐야 한다. 또 다른 나를 집어삼키려는 포식자들을 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들의 흥분된 숨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가리에서 뿜어대는 부패의 냄새를 맡아야 한다.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송곳니에 몸부림쳐야 한다.


비명에 입이 벌어진다. 벌려진 입속으로 튕겨 들어온 나의 피와 살점을 맛봐야 한다. 살아있는 먹이의 신선한 내장을 파먹는, 어미 곰과 아기 곰의 원초성을 고스란히 느껴야 한다.


나는 혼돈에 빠져야 한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다가온다.


낯선 소리가 들려온다.



"작가님, 작가님."


나는 눈을 뜬다. 눈과 코와 입이 보인다. 얼굴 없는 선생님이 아니다.


"작가님 괜찮으세요?"


이 목소리, 낯설지 않다. 선생님이 내게 눈을 맞춘다. 나는 고개 숙여 피하지 않고 선생님의 눈을 마주 본다. 그래,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이제 나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녀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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