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미는 눈을 뜬 채 정신을 잃은 것 같은 태윤을 불렀다. 잠들어있던 그의 동공에 생기가 돌아오자, 그녀는 안도했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 아니요.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셨어요?"
"잠시 꿈을 꿨어요..."
그는 여전히 잠에 취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꿈을 꾸셨을까요?"
"어릴 적 꿈이요, 박수 소리 때문에...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박수 소리와 어릴 적 꿈이 어떤 연관이 있나요?"
태윤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됐다. 모든 걸 얘기할 순 없었다. 하지만 우미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벙긋벙긋 입술을 여닫으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차마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그를 짓눌렀다. 침묵이 길어지자, 구진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하품 소리를 냈다.
"하아아암."
우미는 구진을 제지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사람들의 얼굴을 목도했다. 몇몇은 지루해하는 표정이었고, 몇몇은 고개를 숙여 폰이나 자료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무정한 얼굴로 태윤을 바라보았다. 가까이해선 안 될 이방인을 마주한 눈빛이었다. 우미는 이 짧은 순간, 관계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녀는 흐트러진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보기에 작가님은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우미의 뜬금없는 칭찬에 태윤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태윤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띠었다. 우미는 아련한 옛일을 회상하는 얼굴로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잘 안 쓰는 말이 있어요. <감수성이 풍부하다>라는 말이요. 다른 사람들보다 외부 자극에 민감하고 감성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사용했었는데, 최근에는 <예민하다>라는 말에 흡수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분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겠죠. 보통 사람들은 접촉을 통해 보상을 얻고자 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한 분들은 접촉이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인간의 모순을 누구보다 명료하게 지각하고, 정신이 일으키는 미세한 균열을 잘 포착하다 보니, 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게 경험되겠어요. 어쩌면 작가님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엄청난 용기를 낸 결과일지도 몰라요. 제 말이... 맞나요?"
우미는 말을 끝내고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한 추측성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윤의 언행이 사람들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기에, 그녀 나름대로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구진 같은 막돼먹은 사람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기에, 사회적 배제라는 강력한 조치를 단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태윤의 경우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경멸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태윤은 멍하니 우미를 보다가 대답했다.
"네. 거의 다 맞아요."
이 말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미는 그의 대답에 한시름 놓았다. 그가 그녀의 말에 동조함으로써, 사람들 마음에 뿌리내릴 수 있는 오해의 씨앗을 한 번은 거두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음에도 혼자인 것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감수성은 글 쓰는 사람에겐 꼭 필요한 기질이거든요. 이곳의 박수 소리가 과거의 박수 소리를 연상시켰나요?"
"네."
우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작가님 소개해 주실래요."
"아, 제 이름은 한태윤입니다. 저는 실명을 사용하고 싶어서 필명은 정해오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태윤 작가님이라고 부를게요. 태윤 작가님은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
"저는 아직 창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글 쓰는 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커서 오게 됐어요."
"그렇군요. 그래도 마음속에서 꺼내고픈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태윤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저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그러다 보면 연결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주로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내용이에요. 누군가는 저더러 망상 좀 그만하라고 하더군요. 물론 망상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생각하다 보면 놀랄 때가 종종 있어요. 나도 몰랐던 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든요. 그러면 그와 대화를 시도해 보곤 하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할 수 있다면, 내 안의 다른 '나'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대화를 시켜보고 싶어요."
우미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수강생들을 차례차례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우리 수업 제목 기억나시죠? <자신을 해체하는 글쓰기, 당신이 가진 모든 관념을 의심하는 글쓰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글쓰기>. 태윤 작가님이 한 말이 우리 수업의 핵심이에요.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나를 깨우는 일이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정말로 나인가 하는 점이에요.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생각, 내가 하는 행동. 또 혼자 있을 때의 나와, 다른 사람이 있을 때의 나. 이 모든 '나'들이 정말로 나일까요? 만약 내가 아니라면 누구일까요? 나를 해체하고, 나를 의심하고, 급기야는 나를 파괴하는 과정을 거쳐야지만, 내가 쓰게 될 글에서 '나'라는 일인칭 시점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늘 자신을 해체하고, 의심하고, 파괴하려 해보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이 지난한 과정을 작가님들과 함께 헤쳐나가 보고 싶어요. 참... 작가님들 소개 시간인데 제가 말이 많았네요. 좋은 소개 해주신 태윤 작가님께 손뼉 쳐드립시다."
사람들이 박수 치자 태윤은 진심으로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자신과 연결됐던 많은 사람이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었다. 이상하다는 말은 그나마 예의 바른 표현 중 하나였다.
답이 없다, 어떻게 살래, 사회생활 가능햐나, 세상에 나오지 마라 등등 부정적인 말들을 던지고 떠나갔다.
그렇기에 태윤은 쉽게 마음을 보여주지 않았다. 믿을 만하고 안전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 때에만 자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태윤의 내면을 알게 되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일쑤였다.
정서적 교류의 일방적 차단은, 태윤이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여기게 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사람들이 떠났다.'라는 잘못된 관념이 그의 사고를 지배했다. 하지만 우미는 자신을 다르게 봐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못 보던 것을 읽어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 준다는 느낌은 그의 삶에서 경험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태윤에겐 보통 사람이라면 가질법한 욕망이란 게 거의 없었다. 돈, 명예, 성공, 여자, 타인의 칭송 같은... 그는 자기를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겉으로는 타인의 말에 동조했지만, 마음속에선 자기만의 환상을 빚어냈다. 때로, 이 환상은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둔 외로움과 공격성을 자극해 뒤틀린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외부로 드러나는 순응적인 모습과는 달리, 진정으로 사람들을 존중해 본 적이 없었다.
태윤은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나를 욕하지 않는다면,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를 떠나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서로를 존중할 수만 있다면...